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초기 이스라엘 :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시 읽기

에제르 2011. 4. 18. 16:24

Ⅱ.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는 한 집안의 이야기이다.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조상 대대로 살던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르를 떠나면서 시작된 족장 이야기는 주로 개인적인 사건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성서 이외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창세기 14장은 평원에 있는 다섯 도시(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 혹은 소알)의 왕들이 메소포타미아 동쪽에 있던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네 왕의 연합 군에 대항하여 진을 치고 싸우는 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그돌라오멜, 시날왕 아므라벨의 이름은 메소포타미아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전쟁에 관련된 아홉 명의 왕 가운데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 살렘 왕 멜기세덱 역시 성서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그랄 왕 아비멜렉(창 20; 26)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보디발(39장), 세겜의 지도자인 하몰, 헤브론의 유지였던 헷 사람 에브론, 그리고 창세기 36:31-39의 에돔의 왕들도 찾을 수 없다.

 

 

족장들은 언제 살았을까?

 

학자들은 솔로몬이 기원전 930년 쯤에 죽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열왕기상 11:42에 따르면 그는 40년간 통치한다. 따라서 성전 공사가 시작된 솔로몬 왕 제4년은 기원전 966년 전후였다. 이 시기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성경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2091년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떠남

1876년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감

1446년 출애굽

966년 솔로몬이 성전 건축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족장들의 수명이 지나치게 길다. 둘째, 모세와 아론은 야곱의 아들 레위의 4대손이다(역대상 6:1-3). 이집트 노예의 430년은 레위부터 모세와 아론에 이르는 3세대의 기간으로는 너무 길다. 이렇게 되면 한 세대가 무려 143년이나 된다. 무리를 해서 한 세대를 143년으로 잡는대 해도 모세와 같이 활동했던 여호수아가 레위의 형제인 요셉의 12대 손이었다는 것과도 모순이 생긴다(역대상 7:20-27). 이 정보에 따르면 요셉부터 여호수아까지 열한 세대는 세대당 평균 39년이 된다. 셋째, 이 연대 방식은 고고학 증거와 어긋난다. 출애굽이 기원전 1446년에 일어났다면 가나안 정복은 40년 뒤인(광야생활 40년 뒤) 1406년에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15세기 말(1400년대)에는 대규모 파괴나 인구 변동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오히려 가나안 지역의 물질문화의 변화와 인구 증가는 기원전 13세기 또는 12세기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지역에 있었다는 최초의 역사적 증거는 메르넵타 비문으로 이는 기원전 1207년의 것이다. 따라서 성서 자체의 연대기적 구조는 실제적인 역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찾아서

창세기 12-50장의 족장들은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들의 이웃 나라에 대한 유형론적 원형으로 접근하기가 더 쉽다. 곧 그들은 기원 인물(eponym)로 각 지파 이름의 기원이 된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는데 이는 민족 ‘이스라엘’의 기원 인물이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항상 긴장 관계였는데 롯과 그의 딸들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다(창 19:30-38). 야곱(이스라엘)은 형 에돔(창 25:30, 36:1)이라고 불리는 에서를 속인다.

이스마엘은 이집트 출신의 하녀 하갈의 소생이다(창 16장). 이러한 족장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갈등과 긴장 관계에 있었던 주변 민족들의 정치적 전망을 검토해 보는데 매우 유익하다.

 

창세기 12-50장은 기원전 10세기에(다윗 왕조)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이 자료들이 더 이른 시기부터 유래하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들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는 보수적인 관점의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올브라이트와 스파이저

탁월하고 위대한 신학자인 윌리엄 F.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특히 에프레임 A. 스파이저(Ephraim A. Speiser)는 창세기 12-50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첫째, 성서 족장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세부 자료-사람 이름, 사회적 관습, 법적 절차, 생활 풍속-는 기원전 2000~1001년의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가나안 등의 문화 특징과 잘 들어맞는다.

창세기의 서술은 전반적으로 역사적이다. 성서 외의 방대한 고대 근동 문학 전반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와는 전혀 달리 족장들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해 주는 전기적 세부 자료나 개성에 대한 묘사가 대체로 정확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올브라이트

 

올브라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고고학을 통해 족장 이야기의 전반적인 문화적 환경-성서에 언급된 사회, 경제, 법률의 세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은 초기 시대, 더 구체적으로 기원전 2000~1001년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했다.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G. 어니스트 라이트(G. Ernest Wright)에 따르면,

아브람이 실존 인물이거나, 이런 저런 일을 했다거나, 이런 저런 말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마도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들에 반영된 그의 삶과 시대가 제2천 년대 초기와는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그 이후의 다른 시대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은 증명할 수 있다.” - 라이트

 

존 브라이트

또 다른 제자인 존 브라이트가 주장하는 ‘역사적 증거’를 살펴보자.

그는 이스라엘 선조들이 주로 서북 셈 족 출신이었지만 여러 종족이 섞여 있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모압, 암몬, 에돔(창 19:30-38; 36장)만이 아니라 미디안과 아라비아 부족들(25:1-5, 12-18)과도 혈연관계가 있다. 특히 아람인들과 강한 혈연관계가 있는데, 그들의 메소포타미아 친척들의 고향은 아람-나하라임이나 밧단아람에 위치해있을 뿐만 아니라 라반은 거듭 아람인으로 불린다(창 25:20; 28:1-7; 31:20, 24). 22:20-24에는 아람인과 갈대아 인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후손으로 나와 있다. 신명기에서도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신 26:5)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를 학계에서는 성서의 족장들을 아모리 사람(아람 사람)과 같은 인물들로 보며 이를 ‘아모리 가설(Amorite hypothesis)'이라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첫째,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언 형상과 유사한 현상들이 마리문서에서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습과 제도들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관습과 제도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으로 보아 족장들과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제도는 이스라엘에서 사사 시대(드보라, 사무엘 등)에는 이미 확립되어 있었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생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마리 문서와의 비슷한 점은 예언이 비슷한 문화 환경으로부터 이주해온 선조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전해졌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둘째, 계약 법전(출 21-23장)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판례법이 에쉬눈나(Eshnunna)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잘 드러나는 메소포타미아의 법률 전승과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사법 전승들을 알고 있었던 지방에서 이주해 온 자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전해졌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셋째,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와 6-9장의 홍수 이야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온 비슷한 자료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는 가나안이나 이집트의 문헌과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는 것으로 메소포타미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창세기 시원사 배후에 있는 전승들은 기원전 2000년대 전반에 이주해 온 집단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물론 이를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끼어 있었던 일부 아모리인들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족장들이 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성경 전승은 역사적 사실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성경 자체에서 나오는 증거 자료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성경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다해도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창세기의 등장인물들은 성경이외의 문헌이나 기록에서는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그들이 실제로 생존했는지의 사실여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브라이트가 창세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강력한 이유는 고고학 역시 족장이야기의 실제성을 부정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기에 창세기의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묘사가 더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트 스스로도 성경 기록의 모순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만큼, 그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또 다른 시도들

올브라이트의 몇몇 제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학자들이 올브라이트처럼 엄격하게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 단계를 MB Ⅰ로, 야곱 단계를 MB ⅡB로 추정하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연대를 제시하면서, G. E. 라이트는 “간단히 말해, 족장 이야기는 제2천 년대 초의 배경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올브라이트가 주장한 MB Ⅰ시대에는 실제로 ‘도시’와 연관된 고고학 유적이 나오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보다는 더 나중 시기인 MB ⅡB로의 재도시화 시대와 족장 시대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중심 도시들 가까운 곳에서 장막생활을 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MB ⅡB의 마리(Mari)나 다른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유목민과 도시민의 공존 생활과 비슷한 상황이기에 타당한 듯 보인다.

연대

고고학적 시대

올브라이트의 분류

올브라이트의 연대

2250-2000

EBⅣ

MBⅠ(아브라함?)

2100-1900

2000-1800

MBⅠ

MBⅡA

1900-1750

1800-1630

MBⅡ

MBⅡB(야곱?)

1700-1600

1630-1550

MBⅢ

MBⅡC

1600-1550

 

그들은 성서의 족장들과 제2천 년대(특히 MB ⅡB)의 연관성을 보여주기 위해 창세기 12-50장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주장했다.

첫째, ‘야곱’이라는 이름은 제2천 년대 초기 자료에 일곱 번 나타나며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같은 시기에 나타난다. ‘이삭’이나 ‘요셉’과 같은 예는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이름 모두 ‘아모리어 형태’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족장 시대에 나오는 성서 인명이 제2천 년대 초의 역사적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다.

 

둘째, 올브라이트나 스파이저 등의 학자들은 제2천 년대의 성서 외적 문서에 언급된 사회, 법률 관행들과 성서 족장 이야기의 사회, 법률 관행 사이에 수많은 비슷한 점을 예로 들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누지(Nuzi)에서 나온 설형문자 문서들이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누지 토판은 제2천 년대 중기에 동 티그리스 지역에서 번영했던 민족인 후리 사람들(Hurrians)의 관행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족장들을 후리 왕국 미타니(Mitanni)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려는 학자는 없었지만 이 시기에 후리 사람들이 시리아와 가나안에까지 널리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후리 사람들과 성서 사이에 수많은 연결고리를 제안했다. 누지의 결혼 계약서에 보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여종을 주어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은 창세기 16:1-4의 하갈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누지 토판에서는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나중에 쫓아낼 수가 없다. 이는 창세기 21:10-11의 이스마엘 이야기와 비슷하다.

“실질적인 혈연관계와 무관하게 아내를 남편의 누이로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법을 보면, 후리 사회에서 한 남편의 아내는 특별한 지위와 보호를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이중 역할은 아내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스파이저

 

스파이저에 따르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12:10-20, 20:1-18)이, 그리고 나중에 이삭(26:6-11)이 자기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일화들의 배경에 이 관습이 있다고 한다.

 

 

‘역사성’의 학문적 실패

아모리 가설을 족장 시대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위에 인용된 주장 가운데 많은 부분이 크게 수정되거나 포기되었다.

 

첫째, 유목민의 침략이나 이주가 제3천년대 말엽 도시 몰락의 주된 요인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 시기에 활약한 유목 민족들은 그 이전 시대에도 정착민이 살고 있던 도시들 곁에 살고 있었다. 오히려 인구 과밀, 가뭄, 기근 등으로 도시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 고갈되었을 수 있다. 도시가 사라지자 유목민들의 임시 거주지들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유목민들은 원래 사막 변두리 지역에 살다가 새로운 환경을 이용하여 이전에 정착민이 살던 지역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해도 대규모의 이동과 이주는 없었고, 고고학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대부분의 문화적 변화는 외부인들이 들어옴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생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따라서 올브라이트가 MB Ⅰ로 부른 시대가 실제로는 초기 청동기 시대의 마지막 단계, 곧 도시-이후 단계였으며, 최근 학자들은 대체로 이 시대를 초기 청동기 Ⅳ(EB Ⅳ)로 부른다. 초기 청동기 Ⅳ(EB Ⅳ)에 침략이나 대규모의 이주가 없었다면 아브람의 떠돌이 생활을 이 시기에 연결시킬 이유가 없다. 창세기 12-25장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고고학적 증거와의 모순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와는 달리, MB Ⅰ과 MB Ⅱ라 부르는 시기, 곧 시리아와 가나안이 유목민과 도시 거주민이 나란히 함께 살았던 시기의 상황은 성서의 족장 이야기와 비슷하다. 또한 수정된 아모리 가설은 족장 시대를 제3천 년대가 아닌 제2천 년대로 설정하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다고 해도, 도시 거주민과 부족민(유목민과 촌락 거주민을 모두 포함하는)이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현상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동 지방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이러한 가설에 의구심을 들게 한다.

둘째, 족장 시대를 제2천 년대 초로 설정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다른 기준들에 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었다. 족장 이야기의 세부 자료와 현존하는 제2천 년대 문서들로부터 찾은 정보의 비슷한 관계점이 부정되었다. 한때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던 누지 문서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 증거들을 통해 개인의 생활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 역시 널리 퍼져있는 메소포타미아의 관행을 반영할 뿐이지 가나안으로 전파된 독특한 관습을 보여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중기 청동기 자료에서 식별하는 것은 불확실하거나 의심스럽다. 반면 이런 형태의 이름(아브람, 아비람)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의 문서에 여러 번 나타난다. 또한 같은 구조를 가진 이름들이 아주 흔하게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난다.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이름 역시 고대 근동 역사에서는 골고루 나타난다. ‘야곱’은 중기 청동기 시대에 매우 흔하기는 하지만 후기 청동기 자료에서도 나타나며 그와 관련된 이름들이 엘레판틴(기원전 5세기)과 팔미린(기원전 1-3세기) 아람어에도 나타난다.

 

셋째, 창세기 이야기들에 언급된 법률 관행과 사회적 관습이 족장들의 중기 청동기 연대 추정을 지지한다는 주장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다. 올브라이트나 스파이저 등이 제안한 제2천 년대의 유사점들을 다시 살펴본 결과 많은 유사점들이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를테면 자녀가 없는 사래가 남편에게 자신의 여종을 주는 장면(창 16:1-4)의 누지의 유사점들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고대 바빌론, 고대 앗시리아, 12세기 이집트 문서와 기원전 648년으로 추정되는 님루드(Nimrud)에서 나온 결혼 계약서에도 나타난다.

사래가 아브라함의 누이이면서 동시에 아내라는 것도 문제가 된다. 스파이저가 인용한 계약서를 살펴보면, 어떤 여자를 누이로 받아들인 ‘오빠’가 보통은 그 여자의 장래의 남편이 아니다. ‘오빠’가 나중에 실제로 자기 ‘누이’와 결혼하는 경우가 한번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전에 동생으로 입양했던 입양 문서를 나중에 결혼 문서로 대체해야 했을 정도로 특별한 경우였다. 더구나 성서에서 아내를 여동생으로 지칭한 경우는 법적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속임수의 사건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족장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회학과 인류학의 방법론을 이용하는 최근 연구 결과에 따라 과거에 사용되었던 방법론들(고고학, 문헌학, 전승사)을 보완하고 수정하여 선택적으로 적용 하는 것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가운데 족장 이야기가 관념의 산물(ideology)일 뿐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한다. 그 이야기들은 기원전 제1천 년대에 다양한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동기를 가진 저자들에 의해 문학적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의 역사문헌으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 하면 거짓된 이스라엘 선사시대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족장 이야기가 제공하는 진짜 정보를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족장이야기의 핵심은 전혀 없다는 것일까? 최종 형태의 족장 이야기는 정착 시대 말엽, 기원전 1000년경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반영한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통일체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남부 지파들, 특히 유다 지파가 정규 구성원으로 속해 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다윗 시대에 와서야 생겨났을 것이다. 이 구도는 남부 지파들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준다. 가장 나이 많은 족장(아브라함)은 남부 지역 유다 산지의 전통적 중심지인 헤브론과 특별히 연관되어 있고, 두 번째 족장(이삭)은 훨씬 더 남쪽인 북부 네겝을 본거지로 살아간다. 아브라함이 최초의 족장으로서 갖는 우선권은 다윗과 솔로몬 통치기에 존재했던 부족 상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특히 유다의 관점이 강하다.

 

족장 이야기는 제한적이기만 하지만 어느 정도 재구성이 가능하다. 현존하는 형태의 야곱과 요셉 이야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은 그 전개 과정 마지막에 존재했던 부족 목록을 반영한다.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 부족들의 승리를 묘사하는 고대 시가의 일부분인 사사기 5:14-18에는 좀 다른 목록이 나온다. 여기에는 남부 지파인 유다와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이는 남부 가나안이 아직 이스라엘에 합병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고대 시가에는 므낫세와 갓도 빠져 있으며 후대의 목록에는 나오지 않는 두 지파, 곧 마길(삿 5:14)과 길르앗(삿 5:17)이 나온다. 사사기 5장에 나오는 이 목록을 통해 우리는 12세기 중엽, 기원전 1150년경에 존재했던 부족 연합체를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집단이 적어도 원시적인 형태로라도 기원전 1207년경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 무렵 이집트 왕 메르넵타(Merneptah)가 기념비에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민족을 무찔렀다는 사실을 자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부족 형태의 이스라엘이 중앙 산지에 기원전 1207년 이전에 이미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었다는 알게 된다. 이 공동체는 나중에 새롭게 조직되었을 것이지만 이미 민족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 정체성은 성서의 족장 이야기에 보존되어 있는 조상들의 전승에서 나타났고 동시에 그 전승으로부터 근거를 이끌어냈다. 이 전승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민족 독립성에 대한 주장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가나안의 원주민이 아니라 외국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 건너편’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수 24:2-3)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라 불리는 지역(오늘날의 이라크와 동부 시리아)으로부터 왔다. ‘히브리인들’이라는 용어의 원래 뜻이 무엇이든 간에 전승 안에서의 뜻은 Ibrîm, ‘히브리인들’은 유프라테스 강의 ‘건너편’(êber)에서 온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조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필요한 혈연관계의 끈을 형성하는데 이용하는 흔한 방법이다. 이런 관행은 현대의 베두인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으며 고대의 증거도 많다. 둘 다 ‘아모리’ 왕조였던 바빌론의 함무라비와 앗시리아의 샴시-아다드 1세는 자기네 부족의 기원에 관한 공통된 전승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초기 선조들의 이름 중에는 서 셈(West Semitic)부족들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름이 많이 있었다.

비슷한 허구적 영웅들이 성서 계보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에서 흔히 추적 가능하다. 여라무엘은 다윗 시대에 네겝 어딘가에 살고 있는 비 이스라엘 부족의 이름이었다(삼상 27:10, 30:29).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라무엘 사람들은 유다로 병합되었고 그 새로운 관계는 여라무엘을 유다의 증손자로서 다윗 가문과 방계(傍系)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대상 2:9, 25-27).

 

족장들의 계보에 허구적인 기원 인물에서 유래한 많은 사람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롯의 아들이면서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의 조상인 모압과 벤암미(창 19:37-38)는 명백한 실례(實例)이다. 세겜의 왕자였던 하몰의 아들 세겜(창 34:2)도 그러하다. 때때로 이런 인물들은 이스마엘 사람들의 조상인 이스마엘의 경우처럼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창 16:10-12, 17:20, 25:12-16). 창세기 36장에 기록된 에돔의 계보에는 사람이름, 부족이름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에돔(에서)의 장자는 ‘엘리바스’이다. 엘리바스는 아마도 기원인물이라기보다는 과거의 영웅이었을 것이다.(욥 2:11) 그러나 엘리밧의 아들들의 이름(창 36:11-12)은 욥기에서 엘리바스의 고향으로 나오는 데만을 포함하여 잘 알려진 부족들과 장소들에 대한 기원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기의 계보에서 씨족, 부족, 장소, 지역으로부터 유래한 많은 기원적 이름들과 소수의 전설적 영웅들의 이름이 함께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이름은(이삭, 야곱, 이스라엘, 요셉과는 달리) 성서에서 사람 이름으로만 나올 뿐 부족이나 지역의 명칭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기원적 조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는 전승과 신화의 인물이 되기 전에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그가 살았던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브람’은 적어도 ‘아비람’의 형태로는 모든 시대에서 발견되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 이름은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에 많이 나타난다.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 얼마나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왔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이주는 다른 어느 시대에도 일어났을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원에 있어 가나안 사람들이 아니라는 주장이 너무 지배적이다 보니 전승의 발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적 경계 설정의 한 방편으로서 첫 족장이 외국 땅에서 왔다는 믿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가족과 북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하란(오늘날 터키의 에스키 하란, 옛 하란)이란 도시의 관계는 최초의 이야기 자료(J 문서)에서 아주 세밀하게 다루어진다. 데라, 나홀, 스룩-아브라함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창 11:22-26)-은 하란 근처의 발리크(Balikh) 강 유역에 있는 도시들의 기원 조상들인 것 같다. 세 이름 모두 하란 지역에 있는 파괴된 도시들의 이름, 즉 틸-(샤)-투라히, 틸-나히리, 그리고 사루기라는 이름으로 기원전 제1천 년대 전부터 앗시리아 문서에 나타난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제2천 년대에 틸-나히리는 나후루라 불리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역과 족장들 사이의 관계는 기원전 제2천 년대의 아모리 문화에 대한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세겜(창 12:7), 벧엘/아이(창 12:8, 13:4), 헤브론(창 13:18), 모리아 산(창 22:2), 브엘세바(창 21:33)에 있는 종교 유적을 세운 사람으로 나타난다. 벤저민 마자르(Benjamin Mazar)가 말했듯이 이 유적들은 제1천년기 시대(기원전 1200-1000)에 있었던 초기 이스라엘 주거지의 경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을 북부와 남부에서 각각 가장 유력한 지파인 므낫세-에브라임 및 유다의 영역에 주요한 예배 유적들을 설립한 사람으로 내세운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남부와 북부의 지파들을 통합하면서 공통의 사회, 종교 정체성의 창시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파라오 시삭 1세(성서의 셰숑크)의 전승 기념비에 나오는 네겝에 있는 도시 이름일 것 같다. 이 원정은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 기원전 925년에 있었다(왕상 14:25-26; 대하 12:2-12). 그 비문에 네겝 지방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브람의 성채’ 또는 ‘아브람 요새’라고 읽을 수 있는 지명이 나온다. 이 유적의 위치와 연대기적 맥락은 지명의 유래가 된 아브람이 성서 전승의 아브람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삭

성서의 이삭은 북부 네겝, 특히 브엘세바 오아시스 및 브엘라헤로이(창 24:62, 25:11, 26:32-33)와 분명한 지리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후기 청동기 말엽 이전에는 이 지역에 거주민이 없었다. 북구 지역으로부터 네겝으로의 확장은 일러야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일어난다. 브엘세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성서와 관련된 깊은 우물 하나가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어쩌면 이것이 창 21:25와 26:25인 것 같다. 네겝의 주민 정착은 남쪽으로 확장되어 가다가 11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이는 족장 전승과 브엘세바 지역의 결합이 12세기 전에 일어났을 수는 없으며, 사실상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남부 전승 발전의 일부로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구조적으로 사람 이름, 지역 이름으로 적절하다. ‘웃음’이라는 뜻으로 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 100세에(B.C. 1890 ?) 사라의 몸에서 출생한 아들이다.(창21:-3, 마1:2). 선지자 아모스는 8세기 북왕국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삭’을 이스라엘과 병행해서 사용한다(아모스 7:9, 16). 아마도 이삭이란 이름을 북부 지파들의 지역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J자료가 이삭에 관해 말하면서 북부 사람들의 순례여향을 했던 남부의 순례지 브엘세바(창 26:23, 25)에 종교 유적을 설립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아모스 5:5, 8:14).

 

야곱

창세기에 따르면 야곱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사건들은 이삭의 거주지인 브엘세바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하란에서 돌아온 뒤 야곱은 중부 산지에 있는 세겜 지역에서 산다. 그는 벧엘에 종교 유적을 설립하며(창 28:10-22, 35:1-5), 아브라함처럼 세겜에 제단을 세운다(창 33:8-20). 두 유적은 모두 북부에 있다. 야곱은 중부 산지에 거주한다. 이 시점에서 야곱은 곧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과 중부 산지의 역사적 연관성은, 다윗 시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아주 밀접했다. 따라서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과는 대조적으로 남부 지역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학자들은 ‘야곱’이라는 이름이 ‘야곱-엘’ 또는 그와 아주 비슷한 이름의 줄임형이었다는데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엘’이나 다른 신의 이름과 결합된 ‘야곱’이라는 이름의 초기 형태는 중기 청동기 시대 및 이집트가 아시아에서 온 군주들의 통치를 받던 힉소스 시대(기원전 약 1677-1552년)에 흔히 발견되는 서(西)셈어 인명이었다. 이 이름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우가릿(시리아에 있는)에서도 발견되지만 그 뒤로 성서를 제외하고는 페르시아 시대까지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곱-엘’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지역 이름으로도 쓰인다. 이 이름은 투트모세 3세(1479-1425년)와 다른 이집트 왕들이 무찌른 적들의 목록들에 나온다. 이 문서의 이름은 대부분 도시 이름인데 중부 가나안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세겜 북쪽에 있는 두 도시 르홉과 벳-스안 근방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근접성에 비춰볼 때 투트모세에 의해 점령된 야곱-엘이 성서의 야곱 전승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무모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족장 야곱과 야곱-엘이라는 지명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가? 야곱의 뜻은 아마도 ‘엘께서 보호하소서’라는 뜻일 것이다. 고대에 야곱-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웅이 있어서 이집트 목록에 언급된 도시나 지역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고학자 아하론 켐핀스키는 이스라엘의 시크모나에 있는 기원전 18세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야곱-하르의 갑충형 인장(scarab)에 근거해서, 야곱-하르라는 이집트의 힉소스 왕은 야곱-하르라는 지명을 갖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어느 지방을 다스리던 왕의 후손일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이 지도자가 그 도시 이름의 유래가 된 야곱이었을 수 있다. 이 주장이 가설이긴 이긴 하지만 야곱 전승이 기원전 제2천 년대에 팔레스타인 중부 산지에서 기원했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성서에서 야곱의 이름은 두 개다. 먼저 쓰인 이야기에 따르면 야곱은 얍복강 기슭에서 신적인 존재와 씨름을 한 뒤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창 32:28-29). 창세기 후반부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두 이름은 다소 상호 교환이 가능하게 사용된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내놓았다. 마틴 노트는 지파들이 공유하는 이름인 이스라엘이 전승 발달에서 꽤 늦은 시기에 족장 야곱에게 부여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전승의 정교한 계보 구조는 그 자체가 초기의 특징이다. 이 구조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사회적 정의를 내려주는 것이었다. 한 민족의 기원 인물이거나 야곱-엘 지역의 기원 인물인 야곱은 계보에서 핵심인물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지파 동맹의 형성기에 혈연관계 전승이 만들어질 무렵, 새롭게 출현한 공동체의 기원 인물인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족장을 중심으로 하는 구별된 전승들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이스라엘을 야곱과 구별하려 했는데, 중부 산지에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일종의 초기 부족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메르넵타의 시대 이전에 가나안에서 그 이름이 사용되었다는 단서는 없다. 이 시기에 산지의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유입 민족들 하나에 의해 이 지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계보 구조에서 두 형제가 이스라엘과 에돔으로 동일시되기 이전에 존재했을 것 같다. 궁켈이 지적했듯이 에서의 이름과 성품은 성서 전승에서 지혜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에돔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궁켈은 두 형제의 다툼을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목축업자들이 수렵민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던 문화적 기억에 관련시켰고, 마틴 노트는 이를 길르앗의 역사와 지역적으로 연관시켰다. 그러나 길르앗 지역의 사회경제적 역사를 두 형제 사이의 경쟁관계로부터 추출해 날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그 관계는 문명과 자연 사이의 충돌의 성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창세기 25장과 27장의 야곱과 에서의 대조점을 보면 형제간의 관계는 민족적 경계설정의 범주를 보게 된다. 곧, 한 민족의 조상이 문명과 동일시되어 야만적이고 미개한 다른 민족의 조상과 대조를 이룬다.(창 16:12와 21:20에 이삭과 대조되는 이스마엘의 특징 및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암몬과 모압의 혈통과 비교) 야곱과 에서 사이의 관계는 문화적이고 민족적인 자기 정체성의 표현으로 볼 때 가장 이해하기 쉽다. 이런 특징은 두 형제를 이스라엘과 에돔으로 동일시하기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지만 이 동일화의 과정에서도 계속 작용한다.

 

요셉

이 이름은 아마도 ‘엘께서 더하소서!’라는 뜻을 지닌 ‘요셉-엘’의 줄임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셉은 과거의 영웅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지역의 허구적 기원 인물일 수도 있다. 후자의 가능성은 초기 왕정 문서(삼하 19:21)와 다른 곳에서 북부 지파들을 집합적으로 지칭할 때 ‘요셉의 집’이란 표현을 쓰는 데에서 암시된다. 그러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 이후에 ‘유다의 집’에 상응하는 표현으로서 이 표현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다. 더구나 요셉 지파에 대한 언급은 매우 드물고 후대 자료들(민 13:11, 36:5)에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요셉’은 과거의 지역 영웅이 갖고 있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37장과 39-47장에 나오는 요셉과 그의 가족에 관한 긴 이야기가 다른 족장 이야기와 기원상 독립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요셉의 아들들인 두 지파,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전통적 영토 심장부에 있는 세겜과 도단 인근의 주민들 사이에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또한 많은 학자들은 요셉 이야기에 묘사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1550)에 살았고 요셉은 이집트가 아시아 군주들의 두 왕조의 통치를 받던 힉소스 시대(약 1675-1552)에 살았다고 믿는다. 이것에 따르면 요셉은 아시아인이었으니까 이집트의 아시아계 왕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힉소스 시대의 수도는 나일 강 삼각주 동부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성서의 ‘고센’의 위치였다고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요셉 이야기 전체가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보디발의 일화(창 39:6-20)는 고대 세계의 문학에서 비슷한 것이 많다. 꿈과 해석 이야기도 그렇다. 일곱 해의 흉년 이야기는 이집트어, 아카드 어 및 가나안 어 문학에도 나온다.

더 나아가 요셉 이야기는 이집트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뜨거운 바람은 ‘동풍’(창 41:23, 27)이 아니라 실제로는 ‘남풍’이다. 여러 이집트 관리들에게 부여하는 관직과 직책은 이집트보다는 시리아나 가나안 상황과 더 적합하다. 이집트의 왕(王)은 ‘큰 집’을 뜻하는 ‘파라오’라 불리는데, 이 칭호는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의 통치 이전에는 왕이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창세기 47:11에서 요셉의 가족이 정착하는 지역이 ‘라암세스’라 불리는데, 이 역시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의 통치 이후에나 쓰인 지명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요셉 이야기가 연합 왕국의 설립 이전(기원전 1000년경)에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그 중심은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요셉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는 이르수(Irsu)라는 이름의 아시아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제19왕조 말엽(기원전 1200년)의 어려운 시기(아마 기근)에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았다. 많은 이집트 학자들은 이르수를 제19왕조 마지막 왕의 미성년기에 이집트를 다스렸고 팔레스타인 출신인 토호나 유력한 총리 베이(Bay)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요셉을 세겜과 도단 가까이 살던 집단의 지도자로서 가나안에 있던 시기에 목초지를 찾아 이집트로 이주한 인물로 가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는 중부 산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출신 힉소스 왕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가 이 기억을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 전승과 결합시켰을 수도 있다.

 

 

역사적 증명 범위를 벗어나는 족장 이야기

 

‘아셀’은 이집트인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에 갈멜의 북쪽에 있는 해안지방 이름이었다. ‘유다’와 ‘에브라임, 납달리’는 처음에는 산맥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베냐민’은 그 지파의 땅이 놓여있던던 위치에서 생겼을 것이다. ‘시므온, 므낫세’는 사람의 이름일 것 같다.

후기 청동기 시대 말엽인 기원전 약 1200년경에 시작된 공동체 형성 과정은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는 지파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드러난 시대착오

성서 원전은 최종 편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는데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낙타와 블레셋이다.

족장들의 여러 이야기에서 낙타가 무리지어 등장한다. 그러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파는 이야기(창 37:25)와 같은 경우 낙타는 대상무역에서 짐을 옮기는 짐승으로 나온다.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낙타가 짐을 옮기는 사육동물로 드러난 것은 2천년 대 말기 이후였으며, 낙타를 운반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길들이게 된 것은 기원전 15세기와 13세기 아라비아 오지에서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성경에서는 낙타를 이용한 유목민들을 기드온 시대에 등장한다.(삿 6-8장) 따라서 낙타를 언급하는 창 12:16과 24장 등은 후대의 청중들에게 이야기들을 더욱 생생하게 들려주기 위하여 삽입된 시대착오적인 가필일 것이다.

낙타 대상이 ‘수지, 향료, 몰약’을 운반했다는 요셉의 이야기 속의 더 그럴듯한 내용은, 기원전 8-7세기에 앗시리아 제국의 관할 아래 번영했던 수지맞는 아라비아 무역의 주요 물품들과 분명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또한 창세기 14:14에 나오는 단(Dan)에 관한 언급(삿 18:29 참조), 창세기 21:32-34및 26장에 나오는 블레셋인들에 관한 언급도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다. 에게 해 또는 동부 지중해에서 이주한 민족 집단인 블레셋인들은 기원전 1200년이 될 때가지 가나안의 해안평야를 따라서 거주지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이 건설한 여러 도시는 기원전 11세기와 10세기에 번영했으며 앗시리아 시대까지 그 지역을 계속 지배했다. 이삭 이야기에서 그랄이 블렛 도시라고 언급된 것과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그 도시가 언급된 것은 그 도시가 족장들 이야기를 집필할 당시 특별히 중요했거나 적어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창 20:1).

낙타와 아라비아 상품, 블레셋인, 그랄의 결합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 모든 단서는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나간 뒤 성경 원전이 집필된 후대 시기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무대는 후기 청동기 시대 아얄론 계속과 벳-스안 중부 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기원전 1200년경에는 인구 분포가 매우 희박했었다. 이스라엘 전승이 유목민들 사이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꽤 높다. 그 유목민들은 아브람, 혹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지역 영웅을 숭배했다. 그는 아마도 이미 족장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다. 족장 이야기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그것의 역사성을 증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유감스럽지만 외적 증거에 의거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성경이 말해 주는 것 외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며, 성경의 설화의 자세한 내용을 정말하게 검토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그리고 족장 시대의 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도 없다...... 족장들의 생애에 관하여 성경에 나온 내용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 이 글은 '은혜의 해가 떠오르는 새들녘교회' (http://sdnchurch.onmam.com/1634411) 에서 옮겨온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