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초기 이스라엘 :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시 읽기

에제르 2011. 4. 18. 16:28

Ⅲ.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 자세하면서도 극적으로 재조명된다. 이 역사적 사건은 창세기부터 열왕기하까지 열거된 이스라엘 전체 역사서 1/7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첫 열다섯 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의 틀에 맞추어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의 개별 사건들을 고고학이 뒷받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 기록자들은 오늘날의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세부 자료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나 심지어 역사 변화의 과정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역사 전승들을 신학적 목적을 위해 교훈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출애굽의 여러 기적들은 역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에 가깝다.

 

 

이집트 체류가 허구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집트에서의 체류와 노예생활은 실제 있었을까? 어떤 나라도 그런 치욕적이고 불쾌한 전승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충실하게 전수하는 나라는 없다.
어떤 민족도 자기들이 원래 노예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기원전 2천 년대 이집트에서의 삶에 관해 성서는 그럴듯한 맥락을 제공해준다. 어떤 파피루스는 셈어 이름을 가진 40명 이상의 여성 노예들을 열거하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시프라(Shiprah; 성서의 십보라)였다.(출 1:15-18)

요셉이 머물렀던 고센(창 45:10, 46:28,29,34, 47:1,4,6,27, 50:5; 출 8:22)은 분명 동부 나일 삼각주에 있다. ‘메리카레를 위한 교훈(The Instruction for Merikare; 기원전 2040년)'이라 알려진 문서에서 어느 이집트 통치자가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부(나일 삼각주)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다...... 이 외국인들에 관해 말하자면, 가련한 아시아인들은 사는 곳이 초라하다..... 그들의 발은 음식을 찾아 방황한다....내가 그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아시아인들은 이집트를 몹시 싫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또 한명의 이집트 지도자는 이집트의 변방 수비를 강화함으로써 아시아인 침입자들을 처리하여 ‘아시아인이 이집트로 내려오는 것을 막으라’는 권고를 받는다.

기원전 13세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파피루스 아나스타시 5(Papyrus Anastasi 5)에는 광야로 달아난 두 명의 노예를 추적하려 하는 동부 변방에 있는 주재한 이집트 관리가 보낸 보고가 포함되어 있다. 한 정찰병이 그들을 믹돌(민 33:7에 있는 출애굽 경로 위 한 곳) 근처에서 보았다.

 

제 편지를 받으시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적어서 답장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들이 지나간 길을 발견했습니까? 어느 경비대가 그들이 지나간 길을 발견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뒤쫓고 있습니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냈는지에 대해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출애굽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가능성을 말해줄 수는 있다.

 

또한 중부 이집트 베니 하산(Beni Hassan)에 있는 유명한 벽화에는 기원전 1890년경에 나귀를 탄 아시아 대상(隊商)이 가족과 상품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오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레크미레의 무덤 벽화(기원전 15세기)는 흙벽돌을 만들고 있는 노예들을 보여준다. 성서는 벽돌 제조 할당량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때는 스스로 짚을 찾으라는 요구를 받지만, 할당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출 5:6-18). 역사적으로 그런 할당량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루브르 가죽 두루마리(기원전 1274)는 지정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출 5:14) 이는 성서에서 이스라엘인 작업반장들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한 것에 관해 보도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데이르 엘-메디나의 노동자 마을에서 발견된 한 문서에는 노동자들이 ‘자기네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떠났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고자 사흘 휴가를 요청한 것과 비슷하다.(출 3:18,5:3)

 

 

출애굽을 찾아서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어떤 사건도, 기록된 연대를 알 수 있는 성서 외의 자료들에 나오는 사건과 함께 일어나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가능성에 대한 이집트의 증거는 특정 시대가 아닌 다양한 시대에 걸쳐서 나오는 것들이다.


출애굽 연대의 문제점들

성서의 연대는 그 자체로 문제를 안고 있다. 성서에 보존된 다양한 전승들은 네 세대(창 15:16), 400년(창 15:13), 400년(출 12:40-41)등을 언급한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215년의 전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고대 랍비들의 자료는 210년을 제시한다. 그 혼동은 요셉의 손자인 마길의 경우에 잘 드러난다.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이 살아있을 때 태어나지만,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도 참여한다(창 50:23; 민 32:39-40; 수 13:31, 17:1).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인들의 노예생활은 한 세대에 한정된다. 그러면 어떻게 이집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기의 서두에 나오듯이,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출 1:7)될 수 있었을까? 4세대 만에 가능할까?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는 열왕기하 1:6을 보자. 여기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480년이 지난 뒤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고 한다. 솔로몬이 기원전 960년경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므로 이 계산에 따르면 출애굽은 기원전 1440년경이다. 그러나 ‘480’이라는 숫자는 상징성이 강하다.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40년의 한 세대가 12회 반복되는 숫자이다. 40년의 광야 방랑과 40명의 사사, 제사장 엘리의 재임기간(삼상 4:18),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간 등 모두 40과 관계된다. 열왕기의 자료에 따르면 성전 건축부터 바벨론 포로기의 종결까지도 모두 정확히 480년이 경과한 것으로 기록한다. 결국 이것은 480, 40이라는 숫자는 실제라기보다는 상징성의 숫자라고 보는 것이 더 알맞다. 성서 저자는 성전 건축을 앞뒤로 각각 480년이라는 시기를 배치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성서 역사의 중심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15세기 출애굽 주장

15세기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25-1401)가 가나안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벌였다. 이집트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고대 근동과 지중해 동부를 잇는 군사-경제 요충지 얻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를 시작으로(1482년 므깃도 점령) 여러 수비대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가자, 욥바, 벧스안, 예노암) 향후 100년 가까이 이집트의 지배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된다. 아마르나 서신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데, 도시간의 분쟁과 농촌의 불안 속에서도 패권은 이집트가 쥐고 있었다. 이집트는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성과 조공을 받았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처럼 강력한 왕들의 통치기에 일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집트는 이름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만약 가나안으로의 탈출이 이집트가 가나안을 장악하고 있었던 15세기에 일어났다면 이런 일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고고학 증거들과 충돌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거주 흔적은 기원전 1200년경에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는 광야에서의 40년을 계산에 넣어 출애굽을 기원전 1240년경으로 잡게 한다. 출애굽이 1440년경에 있었다면 그들의 고고학 흔적은 더 1200년경보다 훨씬 일찍 나와야 한다.

 

13세기 출애굽 주장

1200년경 중부 가나안 산지에서 이스라엘이 출현한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13세기 출애굽을 선호하게 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종결 및 철기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에서는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부 고지대에는 수많은 새로운 정착민들이 나타났다. 마을들이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고 대규모의 삼림 벌채가 이뤄졌다. 증가된 인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개간하기 위해 경사지를 계단식 경작지로 만드는 대규모 사업이 착수되었다. 중부 고지대 전역에 물이 새지 않도록 석회 반죽을 바른 방수 내벽을 갖춘 저수지들이 건설되었다. 물론 이런 변화의 주역이 이스라엘 지파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이는 아주 타당한 가정이다. 이곳은 성서가 이스라엘의 정착지라고 말하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수 17:14-18, 20:17, 21:11, 20). 에돔, 모압과의 접촉(민 20-21장)은 그들이 13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출애굽은 13세기가 적절할 것이다. 정복 이야기들에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군사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이집트의 패권이 약화된 기원전 13세기에서는 이해가 된다.

 

람세스 2세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한 지역은 라암세스(Rameses창 47:11)지역이라 불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는 라암셋(Raamses; 출 1:11)이라 불리는데 이곳은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떠날 때 모였던 집결지였다(출 12:37; 민 33:3,5). 이런 사실은 이집트의 행정 중심지를 삼각주 북동부로 옮기고 그곳에 자신이 건설한 수도를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한 파라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와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한다. 그는 외국인들을 징집하여 시행한 광범위한 토목사업으로 유명하다. 그가 세운 도시는 피-람세스(람세스의 집)라 불린다. 피-람세스에서 진행된 건축 공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거기에 보면 람세스 2세의 한 관리가 아피루('Apiru)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현장 주임에게 지시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아피루’를 성서의 ‘히브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아피루 또는 하비루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변절한 외국인들로 여겨졌다. 어떤 학자들은 그들을 ‘뿌리 잃은 떠돌이들’이라고 불렀으며 때때로 그들은 용병들과 동일시되었다. 만약 아피루가 히브리인들과 직접 관련이 될 수 있다면 그들은 람세스 2세 시기의 수도를 건설한 강제 노역자들의 일부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피루가 모두 히브리인들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람세스 2세의 말년에 이집트는 쇠퇴했다. 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에 의한 가나안 공격을 제외하면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기원전 1200년 무렵 제19왕조는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막을 내렸는데, 이 당시의 정치 상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한 억압과 해방의 사건들이 일어날 만한 가장 적합한 배경이 된다.

 

요단 동편 상황 역시 연대 설정에 한몫을 한다. 민수기 20:14-21과 21:21-35에서 모세는 에돔, 모압, 암몬 왕국들과 접촉하고 있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이 정착 왕국들은 아무리 일러도 기원전 13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15세기 출애굽은 거의 무시되어야 할 것이다.

파라오가 말이 끄는 수레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적한다.(출 14:6-9, 15:1-4) 그러나 말과 수레는 기원전 15세기에는 무척 희귀했고 기원전 13세기에 가서야 상당수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15세기가 아닌 13세기 출애굽이 더 타당할 것이다.

 

메르넵타 기념비

메르넵타 기념비는 이스라엘 원정을 포함해 파라오 메르넵타가 수행한 군사 원정을 상형문자로 기록해 놓았다. 람세스 2세를 뒤이은 메르넵타(기원전 1212-1202)는 자기가 ‘이스라엘’을 비롯해 몇 몇 도시들을 무찔렀다고 자랑한다. 이 비석 명문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한 것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초토화 되었고 그 씨앗(후손)은 사라졌다.”

기념비에 묘사된 원정의 연대는 한두 해 오차를 두고 기원전 1205년으로 확정할 수 있다. 메르넵타 기념비는 남아있는 고대 기록 문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처음 언급한 유물이다. 힉소스 시대에 관계된 명문이나 문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관한 언급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후대의 이집트의 비문이나 이집트 텔 엘-아마르나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에 제작된 방대한 설형문서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기원전 13세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인식 가능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수세기에 걸친 출애굽?

 

수백 년에 걸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부터 꾸준히 빠져 나온 것이기에 특정한 연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출애굽이 지속적인 사건이었다면 거기에서 특정한 연대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모한 일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브라함 말라마트

 

출애굽이 어느 특정 시기로 확정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출애굽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정확한 출애굽 연대를 확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출애굽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60만의 건장한 남성(가족을 포함하면 약 200만; 출 12:37-38)을 언급하는 성서의 주장은 물론 과장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언제 살았는가에 상관없이 처음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사람은 출애굽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의 경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를 떠난 뒤 가나안으로 향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좋은 경로-지중해 안을 따라가는-를 의식적으로 피했다(출 13:17-18). 그 지역들은 이집트 요새들이 튼튼히 지키고 있었다. 민수기 33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발부터 가나안 도착에 이르기까지 출애굽의 경로를 따르는 긴 지명 목록을 포함하고 있는 여정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은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지명은 몇 세기 뒤에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일부는 이집트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카르낙에 있는 투트모세 3세의 15세기의 부조에 따르면 비슷한 위치에 있는 지명이 있다. 그렇다면 민수기 33장에 나오지는 확인되지 않은 지명들은 허구일까, 아니면 발견되지 않은 것일까?

 

홍해 또는 갈대바다

홍해의 히브리어 이름은 ‘얌 수프’다. 이것은 홍해라기보다는 실제로 ‘갈대 바다’로 번역이 되어야 알맞다. 얌 수프라 언급된 바다는 현대의 홍해나 그 북부에 손가락 모양으로 들어간 두 곳, 수에즈만이나 에일라트 만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다. 얌 수프가 때로 홍해를 가리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넜다는(출 15:4)물이 홍해라고 보기는 어렵다. 홍해는 매우 넓은 바다이고 거기에는 갈대도 없다.

 

바르드윌 호수와 삼각주 북부에 있는 다른 지역들, 멘잘레 만 팀사 호수, 쓴(Bitter) 호수들, 에일라트 만, 수에즈 만 등이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언급되었으나 마지막 두 지역에 갈대밭이 없다. 어떤 이들은 얌 수프가 신화적 바다라고 주장한다. 신학자 버나드 베토는 얌수프가 때로는 홍해를 때로는 세상 끝에 있는 신화적 바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화적인 바다로서 끝의 바다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존재했던 혼돈과 연결시킨다(창 1:1-2). 따라서 출애굽기는 제2의 창조인데, 끝의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빠져 나온 혼돈이다.

 

시내산 찾기

시내산도 얌 수프와 같이 찾기가 어렵다. 다양한 장소들-전통적으로 시내산으로 예상되는 예벨 무사(기원전 4세기까지 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로부터 남부 시내(Sinai)에 있는 다른 산들, 북서부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떤 산, 그리고 오늘날 이집트-이스라엘 국경 근처에 있는 장소에 이르기까지-이 제안되었다. 전통적인 시내산은 시내 남부에 있는 이 특정한 산은 초기 수도원들이 그곳에 설립될 때에 신성한 전승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좋은 환경 때문이었지 성서의 시내산이라는 확증이나 증거 때문은 아니었다.

 

가데스-바네아(Kadesh-Barnea)

성서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뒤 38년 동안 가네스바네아에서 진을 치고 생활했다.(민수기 13, 14, 20장) 학자들 대부분은 그 장소를 에인 엘-쿠데이라트(Ein el-Kudeirat)와 동일시한다. 물의 이용 가능성과 다른 환경 조건들을 고래해보면 그곳이 가데스 바네아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기원전 10세기이전의 유물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디본(Dibon)의 경우를 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단 동편의 디본-갓(민 33:45)에서 진을 쳤는데, 이곳에 도시는 아니더라도 정착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디본에 진을 치고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총체적인 시기(기원전 1550-1200)의 정착촌은 그곳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디본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기원전 9세기의 몇 건물들과 도시 벽체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은 남아있다.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적 벽에 투트모세 3세가 새겨 놓은 기원전 15세기의 이 지역 도시 목록에는 디본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런 일이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발견되지 않은 유물의 가능성도 열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광야에서

성서의 기록은 복잡하며 다양한 종류의 진술을 담고 있다. 한편에서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 있고, 다른 한 편 끝에는 역사학자들이 다룰 수 없는 신학적 진술들이 있다. 출애굽의 기적은 역사학자들의 범위 밖에 있다.

 

성서 저자는 현대의 역사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에 대해 과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지배적인 것은 신학적 관점이다. 출애굽의 사건이 기록된 글자 그대로 실제로 일어났는가를 탐구하는 것도 매력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 이야기의 힘과 영감을 찾는 것이 출애굽을 바로 읽어가는 태도일 것이다.


성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작업했던 사고 구조에 따라 우리와 무척 다르게 실재를 인식했다....현대적 의미의 역사 편찬을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역사 시대에 일어났던 복잡한 사건들에 대한 역사 서술상의 이해일 따름이다.


[ 이 글은 '은혜의 해가 떠오르는 새들녘교회' (http://sdnchurch.onmam.com/1640232) 에서 옮겨온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