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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1)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1)

에제르 2009. 8. 29. 10:21
오늘부터 두 번에 나눠서 올릴 글은 '매일성경 순'  9-10월호에 기고된 권연경 교수(안양대학교 신약학)의 글 "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입니다.
매일성경을 새로 살 때마다 제일 먼저 보고 읽는 것은 매일성경 앞, 뒤에 있는 글입니다.
예를들어 이번 9-10월호에는 묵상 여정으로의 초대 -  '묵상 여정의 장 : 광야(2)' (p6-9), 신학이 있는 성경 읽기 - '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p184-188), 인터뷰 - '나의 사진은 곧 주님을 에배하는 나의 신앙고백입니다' (p189-193) 입니다..

이렇게 좋은 글들을 그냥 모른채 덮어 둔다는 것은 매일성경 편집부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생각해서 꼭 먼저 읽어 봅니다.
 '이번 호에는 어떤 좋은 글들로 나를 묵상의 사람으로 무장을 시킬까'.... 이렇게 매 번 기대하는 바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호에서도 역시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글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권연경 교수님의 글은 반갑습니다...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 분의 저서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를 읽고 나서 성경을 보는 관점을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매일성경 순' 9-10월호에 실린 권연경 교수님의 글을 두 번에 나눠 이 곳에 옮겨 놓음으로 더 많은 분들이 묵상을 하시는 데 저와 같은 도움을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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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는 성경을 읽는 방식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다. 물론 이 음성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듣기만 하면 되는 음악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음성에는 내가 듣고 '이해해야'할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큐티를 하거나, 혹은 하려고 노력한다. 나를 향한, 혹은 내 오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좋은 의도 속에 위험 또한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또한 사람의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태복음이나 베드로전서처럼 저자의 이름이 달려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점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타인을 위한 타인의 글

사람의 글인 성경에는 불가불 다양한 인간적 정황이 얽혀 있다. 바울의 편지들에서 보듯, 모두 나름의 구체적인 사연들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령 갈라디아서는 성도들이 믿음과 성령의 진리를 떠나려는 위험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편지다. 그러니 그 내용은 시종일관 이 문제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사람의 글로서의 성경은 일차적으로 고대의 어떤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격언집처럼, 오늘 내가 읽고서도 바로 "아멘"할 수 있는 성격의 글이 아닌 것이다.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기대하며 성경을 펼 때, 우리는 지금 내가 읽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위한 옛날 누군가의 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나를 위한 '직통 계시'로 본문을 읽게 되면, 본래 저자와 본래 독자 간에 오고갔던 정황과 사연을 무시하는 셈이 되고, 이는 곧 본문의 본 의미를 왜곡하는 결과가 된다. 내가 로마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해서, 바울이 옛날 로마인들에게 했던 말이 하나님이 지금 내게 하는 말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것을 바꾸는 건 나다. 그러니 무리가 따른다. 가령 "제가 여러분에게 가려고 했던 것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었다고 하자(1:13). 실제로 어떤 신자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여러번 자신을 찾아오려 했지만 좌절하셨구나 하는 '말씀'을 읽어내고 자신의 완고함을 회개한다.
 물론 이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한 체험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그는 이 구절이 자신의 고집을 꾸짖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적용은 본문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친구의 방문을 앞둔 사람은 또 자기 입장에서 이 구절을 갖다 붙일 수 있을 것이고, 몇 차례 어학연수를 시도했던 대학생은 또 자신의 문맥에서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여러분이 나를 스페인으로 보내 주면 좋겠다"(15:24)는 대목에 오면,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후원을 부탁한 것 처럼 나도 어학연수 보내 줄 누군가를 찾으라는 말씀이라고 '적용'할 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우리의 읽기는 '꿈보다 해몽'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본문을 존중하는 읽기

물론 이 해몽은 전적으로 내 맘이다. 구체적인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은 본문 자체가 아니라 나의 창조적 혹은 이기적 상상력인 것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어차피 본문의 본래적, 혹은 역사적 의미가 무의미한 상황이니 그냥 내가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재료로 삼긴 했지만, 실제 조리되어 나온 음식은 나 자신의 생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이런 현상을 해석학적 우상숭배라 부른다.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이스라엘처럼, 내 생각의 송아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착각하는 행태다. 성경을 빙자했다는 사실 말고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을 내 생각이 투영되는 거울로 삼고, 본문의 이름으로 나 자신의 생각을 '발견'한 것뿐이다. 내 마음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은혜'받는 이런 식의 자의적 해석과 자기도취적 감동이 초월적 은총일 가능성은 적다. 진정으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초월의 음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경은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우리 삶이, 혹은 우리 교회가 이토록 무력한 것이 어쩌면 이런 자기중심적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성경의 본문을 대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이 내 통제와 조작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남의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를 위한 말씀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말씀을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는 없다. 나 아닌 남의 말, 내 생각이 아닌 타인의 생각을 담은 글이기에, 여기에는 겸허하고 신중한 듣기가 필요하다. 무엇을 적용할 까를 묻기 전에 지금 읽는 본문의 본래 의미가 무엇일까를 묻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우리 인간들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지만, 우리의 노력은 들려지는 말씀을 정확하게 들으려는 것이어야지, 대충 듣고 내 맘대로 상상하는 그런 부지런함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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