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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2)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무엇을 얻으려고 큐티를 할까? (2)

에제르 2009. 8. 29. 10:21
성숙을 위한 말씀 읽기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두신 '족집게 예언'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적어 둔 글들의 모음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그 글에 얽힌 저자들과 독자들의 문화상과 세계관, 그리고 그 글이 쓰여져야 했던 특수한 상황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 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님에 의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며 읽는다. 애초에 다른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 될 때, 그 대화가 단도직입적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러써 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도출해 내게 하는, 굳이 말하자면 간접적 대화의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듣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읽고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되는 단답형 답안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수능시험은 답 자체를 외우기보단 답이 도출되는 원리를 알기 원하고, 기계적인 공식 암기보다는 문제해결 능력을 우선시한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을 때, 이야기가 들려주시는 예수님처럼, 당신의 뜻을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얼핏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이야기들을 건네주신다. 단순한 삶을 위한 단순한 답변이 필요한 다섯 살 꼬마에게는 당혹스러움이겠지만, 삶의 새로운 상황은 언제나 '창조적 판단'을 요구하고, 그래서 우리에겐 상황에 대처할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스물다섯 청년에게는 오히려 불가피한 화법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기초해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지만, 이는 무조건 외워서 우리 삶의 답안지 위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어린 아이로 머물 수 없는 우리는 어른에 어울리는 영적 생활력과 영적 생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엄마에게 묻지 않아도 스스로 사리를 판단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한 영적, 도덕적 판단력 혹은 감각을 길러야 한다는 이야기다(히 5:14). 그런 점에서 성경은, 끊임없는 적용과 실천을 통해 영적 감각을 익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갈 수 있도록 돕는, 말하자면 일종의 훈련 지침서다.
우리의 큐티가 내 삶의 모든 결정을 엄마에게 떠맡기는 다섯 살 짜리의 물음과 같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와 말씀과의 만남음 아침 식탁에서 대학생 아들이 연륜 깊은 부모와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과 비슷하다. 마마보이가 아닌 정상적 가정이라면, 부모님의 말씀은 그날 내가 할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나, 나를 기르며 있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아예 다른 누군가에 관한 잡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당장 나의 하루와는 무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남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 삶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고, 나의 판단력을 더 깊게 하고, 그래서 내 삶이 더 성숙해지도록 돕는 지혜의 말씀들이다. 내가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해주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과 행동을 더 깊게 하고, 그래서 내 삶이 더 성숙하도록 만드는 그런 말씀들이라는 것이다.
나와 무관한 듯 보이는 성경의 말씀들 역시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선별된 가르침들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태초 인류의 이야기든, 이스라엘의 이야기든,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든,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든 모두 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이런 '남의 이야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성숙한 내 삶을 위한 지혜의 말씀들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사 미래를 약속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그 약속에 응답하지 못하고 죄악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스라엘의 좌절 속에서, 그 좌절 속에서 피어나는 새 시대의 소망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인류의 죄를 위해 고통당하고 부활하신 이야기 속에서, 또 초대교회가 그 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하늘을 향한 깅을 걸어가는 복잡다단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내 삶을 지탱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오늘 내 하루를 위한 족집게 지침은 없지만, 나는 이렇게 이어져 온 하나님의 이야기, 혹은 그 하나님과 맺어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으며, 내 삶의 근거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내 삶을 다시 생각한다. 발 디딜 곳을 일일이 짚어주는 가르침들은 아니지만, 내 가는 길을 더욱 환하게 밝히는 등불이다. 내 판단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지만, 정작 그 판단을 밝히는 지혜는 하늘의 것이다. 그 지혜를 위해 우리는 매일 성경을 펴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을 고대하며

성경읽기의 마지막은 정적인 지혜가 아니라, 동적인 순종이다.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바른 논리가 필요하듯, 삶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변화가 요구된다. 여기에는 '글'의 수준을 넘는 역학, 곧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창조적 생명의 작용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씀읽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작용이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은 바로 '글' 곧 '의문(letter)'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 점에서는 헬라의 지혜 역시 마찬가지다. 육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들에서는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다. 바울이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이 생명의 힘은 복음 곳에 있다(롬 1:16). 이 점에서 우리의 성경읽기는 사람의 글 읽기를 넘어선다. 그러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읽는 방식이 더 신비적이거나 혹은 미신적이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묵상하는 읽기를 통해서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신념때문이다. 성경을 펴며 우리가 기대할 것은 오늘의 우리의 결정을 위한 단답형 지침이 아니라, 내 삶을 지탱해 갈 이러한 생명의 작용,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문제들은 무지로 인한 당황스러움보다는 내 욕신으로 인한 완고함일지도 모른다. 아담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브라함의 죽은 몸에서 아들이 나게 하시고, 마른 뼈들에게 영을 주어 큰 군대를 만드신 하나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오늘 내 삶에도 말씀해주시기를 고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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