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러분이라면 종교에 대한 논쟁으로 소동을 이르키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예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얼마나 여러분의 친구가 되도 싶어하시는지를 알아볼 거예요.
예수님의 생명은 생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철학적 관념이 아니예요. 추상적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신학적 개념같은 것도 아니죠. 그것은 충만함이예요. 자유예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설사 의사가 MRI검서 결과를 알여 주면서 암이라는 말을 한다 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예요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생명이예요
그 생명을 누리는 삶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죠. 열심히 일하고 사역을 확장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그런 삶이 아니란 말이예요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날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토록 공유하고 계시는 사랑의 관계 속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종교적인 의식이나 따라야 할 규정들을 함께 보내셨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거리가 먼 이야기예에요.
그런데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규정을 준수하게 만드는 교묘한 조작으로 성장해 온, 일 중심의 종교적 문화에 쉽게 사로잡혀 왔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몸부림칠 때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안전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교훈들 중 하나는 종교의식이나 규정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었죠.
예수님은 종교를 일신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오셨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든 종교와 규정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능력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 거예요.
종교는 죄책감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지책감을 이용해 왔어요.
종교적인 의무감에 넌더리가 나고 그것만으로는 우리 마음이 열망하고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만 있다면, 십자가는 그 어떤 것보다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이제 사랑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어요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이는 일이 일어나게 될 거예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사람들이 예수님을 좀 더 잘 알고 예수님이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 드리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 일이 교회에서 시작되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자신의 가슴에서 시작될 거예요.
기독교가 윤리에 관한 것이라는 그 잘못된 생각을 언제쯤 버릴 거예요?
조직은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동의할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의견들은 모두 권력 다툼이 돼요.
모든 사람이 교회를 통해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세상에 정말로 드러내는 ㄱ회의 본래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저 자기들의 밥그릇만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되고 마는 거예요.
주어진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심오한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를 그저 도와주는 삶
교회라 부르는 것을 의지하기 보다는 주님을 더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예요
당신이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잡고 계신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예요.
당신은 당신이 선행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잘 댛 줄 거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 왔어요. 하지만 당신의 행동으로 하나님을 통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럴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고난을 당하는 까닭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로 쉽게 받아들이죠. 고난은 종종 하나님께서 어떤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줘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따를 수 있도록 말이예요.
자기 삶을 자기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시도록 그분을 조종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당신을 괴롭히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깨어진 상처들을 통해 당신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에 고난을 주시는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겪는 고난을 사용하시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죠. 고난을 당하는 동안 불평과 비난으로 하나님을 밀어내려 하기 보다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걷는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시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나는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보다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꼐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 안에서 삶을 나누는 것을 배우세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옳아야 한다는 착각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지도자들에게 가장 속기 쉬운 사람들은 지도자들을 특별히 신성시하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조건으로 어떻게든 안정감을 보장받고 싶어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게 될 거예요.
매일 당신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에요.
하나님께서서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 것을 우리 힘으로 움켜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언제나 최악의 결과가 생기게 되는 거예요.
가장 불합리하고 아리석은 일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경우를 상당히 많이 보았죠.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이가 친척이나 가족이 아닌 다른 어른들과 사랑스런 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것이랍니다.
교회 생활을 하나의 모임이라고 보는 한,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그 깊이를 잃게 될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조직을 남겨 주시지 않으셨셧어요. 대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건 크건 간에 조직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고 다투게 되는 거예요.
가정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 서로를 사랑하고 삶의 여정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배우세요.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을 배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교회예요.
공동체의 삶은 여러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에요.
그 어떤 교회 모델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거예요. 그 반대예요.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삶이 교회로서 표현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것이 바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초조해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들 속에서 자족하며 살아갈 때 훨씬 더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충실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세요. 그들이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거예요.
대부분의 기독교 모임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너무 많이 가르쳐 주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의 임재라는 실체를 거스르게 만들고 있어요.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함께 나누기 때문에 교회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면 아마도 모임을 우상시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신뢰는 하나님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근심과 실망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해 주죠.
누군가 하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거든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일을 하고, 그러는 가운데 당신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그 일을 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신뢰를 무뢰함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일정에 사로잡혀 성경구절을 인용해 가면서까지 하나님꼐서 자기들의 방법대로 일하실 거라고 주장해요.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크게 망가진 것은, 사람들이 수입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역을 이용하기 때문
일단 사역이 수입의 원천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섬기도록 그들을 조정하는 식으로 변해갈 거예요.
예수님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매주 같은 방식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교회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대신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으로 생각하셨죠.
꼭 찬송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예배는 아니에요. 예배는 예수님 안에서 매일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이에요. 그 삶은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실 수 있게 해 드리는 삶이리도 하고요.
어떤 모임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해 보세요.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며 살아가는 삶을 배우는 것이 교회 생활의 핵심
사역의 성공이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요.
에배라는 형식을 사람들을 계속 모이게 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부지중에 진정한 영적인 삶에 혼란을 빚는 거죠.
제도적인 틀 속에 갇힌 교회는 전체의 편리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고아원과 같아요. 그 속에서는 규정을 따를때 가장 잘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연결시켜 주시는 방법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좋아하게 되고 일단 프로그램을 자신들의 영적인 삶을 구성하는 요소로 의지하게 되면, 그들은 프로그램이 가지는 한계들을 볼 수가 없어요. 하지만 프로그램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대신 할 수는 없어요.
그냥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세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나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마음 속에 점점 더 확신을 주시는 것을 따르세요.
주님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 주는 단순한 조직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어요. 문제는 조직이 에수님을 의지하는 우리의 삶을 대체하면서 조직 자체가 그 힘을 행사할 때 생기게 되죠.
함께 노래하는 것을 우리는 '예배'라 부르고,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을 '교제'라고 말하죠. 그리고 정말 마음에 담건 담지 않건 간에 그저 참석하기만 하면 그런 것들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왔어요. 우리가 진행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에 헌신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어요.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의 짐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서로 도우며 예수님만을 향해 모여드는 하나의 무리,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랍니다. 그것이 바로 모이는 거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모이느냐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께 모이는 것만이 정말로 모이는 거예요.
우리의 목적지는 언제나 똑같아요. 바로 예수님이죠! 모임의 형태나 계획된 프로그램이나 안정된 보수나 예측할 수 있는 장래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안전한 건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지, 우리의 환경이 좋기 때문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