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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스라엘 :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시 읽기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초기 이스라엘 :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시 읽기

에제르 2011. 4. 18. 16:18

Ⅰ. 성서와 고고학

 

 

성서가 쓰인 과정과 성서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현대의 고고학 발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고고학 탐사는 두 개 면이 사막과 접해 있고 한 개 면이 지중해와 접해 있는, 지극히 면적이 좁은 땅에 집중되었다. 그곳은 수천 년에 걸쳐 반복되었던 가뭄과 거의 끊임없이 계속된 전쟁에 시달렸다. 그 지역의 여러 도시와 인구는 이웃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에 비해서 규모가 매우 작았다. 마찬가지로 물질문화 또한 양쪽 지역의 찬란하고 풍요로운 문화와 비교할 때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성스러운 종교문서로서, 역사문서로서 그리고 세계 문명과 문화에 전례 없는 충격과 영향을 끼친 문학의 걸작이 탄생한 땅이다.

 

구약 성서와 나일 강과 티그리스 강 및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성서의 탄생 시기와 집필 이유 및 과정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고학 연구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의 갖가지 전통이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던 기원전 1000년부터 400년까지 600여 년 동안의 생활과 각종 언어 및 여러 사회와 역사의 전개에 관한, 놀라우리만치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성서 원본 내용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고고학적인 증거를 결합시킴으로써 성서에 묘사된 영웅 이야기의 위력 및 시적 가치와 고대 근동 역사의 실제 사건 및 전개과정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받은 점이 매우 중요하다.

예전에는 성서의 무대가 된 세계를 철저하게 탐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웃 나라 사람들이 재배한 농작물과 여러 도시를 건설한 방법, 무역 상대 등을 알게 되었다. 성서에 언급된 수십 개의 도시와 마을의 위치가 확인되고 발굴되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과 블레셋사람, 페니키아 사람, 아람사람, 암몬, 모압, 에돔 사람의 문명 건설 시기와 내용도 분석해낸다. 발견 된 수는 많지 않지만 중요한 비문(碑文)과 봉인도장이 발견되어 성서 원본에 언급된 인물들과 사건에 연결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 발견과 탐사로 인해 성서 이야기의 세부 사항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달리 성서에 언급된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성서 본문에 쓰인 ‘글자 그대로’ 특정 시대나 특정 방식대로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증언과 기록, 불멸의 구약성서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이기도하다. 성서는 여러 면에서 다양성을 띠고 있다. 성경(Bible)라는 말은 그리스어 ta biblica, 곧 ‘책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구약 성서가 여러 잡다한 책들을 단순히 한권으로 묶은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는 수천 년의 기록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체엄과 신앙이 녹아 있다. 구약성서는 유대인에게나 기독교인에게 역사적인 체험을 신앙으로 해석하고 고백하여 삶의 궁극적인 뜻을 밝히려는 거룩한 역사작업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험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약성서에는 신앙, 도덕, 예배 의식, 설화, 전설 등이 포함된 ‘신앙의 도서관’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에 관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적 삶에 관한 권위 있는 증언으로 받아들였다. 구약성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기록, 전승, 보존된 말들이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동체에 의해 편집되고 모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이들의 신앙의 지침서와 정경이 되었다.

 

구약성서가 글들의 모음이란 맥락에서 볼 때, 성서 문학이 사회적 현실의 산물이란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내에서 역사를 기술한 관습 속에는 사건을 ‘있었던 그대로’의 기술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 그리고 그런 보도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특정한 세계 이해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신앙공동체의 구성원인 독자가 “믿게 하려는 필요 충분한 만큼”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의 발전을 위해서 문학이 가지는 이런 사회적 기능과 그 편향성을 의식하면서 수행할 필요가 있다. 성서를 기록한 이들은 성서가 계속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교육되고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고양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이들이다. 성서 기록자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메마른 사건들로 나열해 놓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소망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읽는 이들을 설득해서 그 이야기를 읽고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 기록이 문학 작법과 비슷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가는 거의 소설가와 다름없이(어쩌면 소설가보다 더) 이야기 순서, 도입과 종결, 심층 의도, 성격 및 심리 묘사 그리고 줄거리를 구성해야 했다. 역사학자들은 종종 역사는 단지 과학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쉽게 단조로워지고 지루해질 수 있었던 역사기록은 그들에 의해 매력 있고 흥미진진하고 감동이 넘치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구약 성서는 역사를 녹음한 ‘녹음테이프’가 아니라 설득과 감동과 줄거리가 있는 ‘드라마’에 가깝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에게 있어 주요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증언하는 기록이(성서) 후대에 계속 읽혀지고 교육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역사가임과 동시에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구약성서 경전의 역사

 

성경 자체는 신앙의 원천이자 신앙을 구성하는 바탕이다. 동시에 신앙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성서 자체의 본문은 그 분량이나 내용에 있어서 더 많아지지도 않았고 새로운 것이 더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새로운 성경은 계속 번역이 되어 나온다. 그 이유는 첫째, 말과 글의 표현과 뜻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둘째, 기존의 번역 성경에 잘못된 번역이 있거나 부정확한 곳이 있기에 바르게 번역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성경을 읽는 대상의 나이, 성별, 사회, 문화 등이 따르기 때문이다. 넷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뜻 표현의 다양성이 새로운 번역을 요구한다. 다섯째, 성서 원문의 새로운 연구 결과물이 또 다른 성서 번역을 허용한다. 이것은 성서 본문의 분량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의 해석과 이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브리어 경전

1) 유대교의 경전

유대교인들은 그들의 경전을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라는 긴 이름으로 부른다. 히브리어로는 『Torah Nebhim Ketubhim』이라고 한다. 율법서라고 하는 ‘토라’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고 하는 다섯 책이 들어 있다. 그래서 ‘토라’는 일명 ‘오경(五經 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예언서인 ‘네비임’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로 나뉘며, 전기예언서에는 ‘여호수아기’ ‘사사기’‘사무엘기’ ‘열왕기’가 들어 있고, 후기예언서에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열두 책’이 들어 있다. ‘네비임’에는 이처럼 전.후기 예언서 각각 네 권씩 모두 여덟 책이 들어 있다. ‘열두 책’이라는 것은 달리 ‘소예언서’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는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댜서’ ‘요나서’ ‘미가서’ ‘나훔서’ ‘하박국서’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와 같은 열두 책이 들어 있다.

성문서인 ‘케투빔’에는 ‘시편’ ‘잠언’ ‘욥기’와 같은 시와 지혜,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기’라고 하는 다섯 두루마리(하메쉬 메길롯), 이 밖에 ‘다니엘서’ ‘에스라-느헤미야기’ ‘역대지’와 같은 책들이 들어 있다. 성문서에 들어있는 책의 수는 시와 지혜 3권, 다섯 두루마리 안에 들어 있는 5권, 나머지 3권, 모두 11권이다.

 

히브리어 경전에 들어 있는 낱권 책의 수는 ‘토라’에 5권, ‘네비임’에 8권, ‘케투빔’에 11권, 모두 합하면 24권이다. 유대교 안에서 히브리어 성서가 어떤 경로를 거쳐 경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라고 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일찍부터 율법서가 경전이 되고, 그 다음에 예언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경전이 된 것 같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먼저 율법서가 기원전 5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때에 에스라의 주도 아래에서 경전이 된다. 예언서가 경전이 된 것은, 일반적으로는, 시몬(219-199 B.C.)이 대제사장직에 있을 때라고 본다.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이 마지막으로 경전이 되기는 하지만 ‘시편’과 같은 책은 일찍부터 예언서와 함께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결국 기원후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히브리어 성서의 범위가 확정되기에 이른다. 그 동안 경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스겔서, 잠언, 아가, 전도서, 에스더기 등이 이때에 함께 경전이 된다.

2) 사마리아 경전

그리스시대 초기 유대 땅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중심지였을 때, 옛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심지 사마리아에 살던 야웨 숭배자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곧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겜 근처의 그리심 산을 그들의 제사의 중심지로 정하였다. 그들은 경전으로서는 오경만을 받아들이고, 외경으로는 “세페르 하야밈”(Seper Hayyamim: “역사서”)과 “메마르 마르카”(Memar Marqa: “마르카의 교훈 속에 담긴 모세의 이야기”)가 있다.

3) 알렉산드리아 경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그리스어 구약이 그들의 경전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 역시 사두개파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같이 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번역하였다. 나머지 책들도 그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번역되었으며,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한 다른 책들(외경)을 성서에 포함시키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의 경전은 어디까지나 오경 만이었다.

 

그들의 경전이 히브리어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지금의 히브리어 마소라본문 성서와는 분량이나 책 편집이 다르다. 히브리어 경전은 구약을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라고 하여 셋으로 나누지만, 알렉산드리아 경전은 구약을 오경, 역사서, 문학서, 예언서로 나눈다. 오경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들어가고, 역사서에는 ‘여호수아기’ ‘사사기(또는 판관기)’ ‘룻기’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 ‘역대지하’ ‘에스라기 1(외경)’ ‘에스라기 2(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 ‘에스더기’ ‘유딧기’ ‘토비트기’ ‘마카베오기 1’ ‘마카베오기 2’ ‘마카베오기 3’ ‘마카베오기 4’를 편집하였고, 문학서에는 ‘시편’ ‘송시’ ‘잠언’ ‘전도서’ ‘아가’ ‘욥기’ ‘지혜서’ ‘집회서’ ‘솔로몬의 시’를 편집해 넣었으며, 예언서에는 ‘호세아서’ ‘아모스서’ ‘요엘서’ ‘오바댜서’ ‘요나서’ ‘나훔서’ ‘하박국서’ ‘스바냐서’ ‘말라기서’ ‘이사야서’ ‘예레미아서’ ‘바룩서’ ‘애가’ ‘예레미아의 편지’ ‘에스겔서’ ‘수산나’ ‘다니엘서’ ‘벨과 뱀’ 등을 편집해 넣었다. 위에서 보듯이 배열과 분책(分冊)방법이 히브리어 경전과 다르다.

4) 쿰란 경전

1947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유대 광야 두루마리' 혹은 '사해 두루마리'로 불리는 구약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열한 개의 동굴에서 「에스더기」만을 제외한 구약의 모든 옛 사본들이 여러 종류 발견되었다. 이것은 쿰란 종파의 경전이나 유대교의 경전이 거의 같았음을 암시한다. 다만 ‘에스더기’의 경우는,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 그들의 경전에 들어 있기는 했지만, 우연히 발견되지 않은 것일 뿐인지 알 수 없다. 거기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사본들은 주전 2세기로부터 주후 1세기에 속하는 사본들로서 그전까지 가장 오래된 것이었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보다 천년 이상이나 더 옛 것일 뿐만 아니라 구약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 본문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독교 경전

1) 가톨릭 경전

가톨릭에 와서는 경전이 확대되고 재편집된다. 확대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 경전에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과 함께 구약과 신약 중간기에 형성된 제2경전이 첨가된 것을 일컫는 것이었고, 재편집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첨가 외에, 히브리어 경전 24권을 70인역을 따라서 39권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경전의 ‘사무엘기’ ‘열왕기’ ‘역대지’를 ‘사무엘기상’ ‘사무엘기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지상(歷代誌上)’ ‘역대지하(歷代誌下)’로 나누고, ‘에스라-느헤미야기’를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로 나누고, 소예언서 ‘열두 책’을 열둘로 나누어서 구약을 모두 39권으로 재편집하였다.

 

구약성서는 일찍부터 두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역 구약, 일명 칠십인역(LXX)이다.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는 소위 외경(外經)이라고 하는 책들이 더 편집되어 있어서 가톨릭의 성서가 된다. 개신교에서 외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第二經典,deuterocanonical)’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합친 성경을, 가톨릭에서는 ‘제1경전’ 혹은 ‘원경전(原經典,protocanonical)’이라고 한다.

 

제2경전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 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1977)에 보면, ‘토비트’ ‘유딧’ ‘에스델(제1경전 에스더기의 추가부분)’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제1경전 다니엘의 추가부분)’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바룩서’ 안에는 ‘예레미야의 편지’가 마지막장으로 편집되어 있고, ‘다니엘서의 추가 부분’에는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이 들어 있다. 영어개역표준성서(Revised Standard Version) (1957)에 실린 제2경전에는 ‘제1에스드라’ ‘제2에스드라’ ‘므낫세의 기도’가 더 들어 있다.

제2경전에 속하는 이러한 책들은 본래 유대교가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인 ‘칠십인역’에 들어 있던 것들을 초기 기독교가 받아들이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2경전에 속한 책들이 제1경전과 합본된 것은 기독교의 작업이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사와 관련된 것이다.

 

2) 개신교 경전

개신교의 구약성서는 39권의 낱권으로 형성된 구약과 27권의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신교의 성서가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것은 구약 외에 신약을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구약의 경우도 내용은 같지만 책의 분책과 배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는 '사무엘 상' 과 '사무엘 하'로 나누지만 유대교 경전에서는 '사무엘, 한 권으로 구성하고 있다.

책의 배열에 있어서도 개신교는 욥기, 시편, 잠언 등으로 되어있는데 유대교 경전에서는 시편, 욥기, 잠언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가톨릭과 다른 것은 가톨릭이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외경(外經)을 경건문학으로는 받아들여도 경전으로는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톨릭에서는,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어 오다가 ‘제2경전’으로 정착되었지만, 개신교 쪽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 안에는 들어 올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개신교 가운데서는 어느 한 교회도 외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없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성공회는 외경을 가장 존중하는 교회다. 그들의 기도서에 붙어 있는 성구 절에는 언제나 외경이 인용된다. 최근에 영국 성공회에서 개정한 성구집에 보면 외경에서 인용한 일과가 44개나 되고, 미국성공회가 사용하는 최신 개정판 성구집에는 무려 110곳의 외경 인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종교 개혁자들이 외경을 중요하게 권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경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성서 고고학

 

성서고고학은 성서 시대, 즉 성서의 시대적 배경과 성서 지역, 즉 성서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지리적 배경에 해당되는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성서고고학을 시작한 이들은 대부분 구약성경학자들이었다. 따라서 성서 고고학이라고 하면 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과 관련된 지역의 고고학 자료들을 그 사건들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신약성서 고고학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처음에 성서고고학을 시작하여 학문적인 기틀을 닦아 놓은 학자들이 구약 전문가들이었으며 또한 성서고고학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이스라엘 학자들이 신약 성경을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고학은 성서의 집필과 역사적인 신빙성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성서가 비교적 후대에 쓰였으며 내용의 대부분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과격한 비평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고고학의 초기 임무였다. 성서가 땅에 대한 현대적인 탐사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일련의 획기적인 발견과 수십 년에 걸쳐서 꾸준히 진행된 고고학 발굴과 해석을 통해서 대다수 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이,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 줄거리에 관한 한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서 원본이 그 속에 묘사된 여러 사건이 일어난 시기보다 오랜 후에 문서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보존된 확실한 기억에 토대를 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결론은 고고학과 역사학의 몇 갈래 새로운 증거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성서를 따라 탐사하다

1838년, 미국 회중교회 목사로 당시 하버드대학의 자유주의적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엔도버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에드워드 로빈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역사적 장소의 위치를 찾아내어 성경을 비판하는 이들을 납작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185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탐사했다.

성서에 들어있는 지리학적인 정보를 활용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현재 아랍 지명을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로빈슨은 과거에 잊힌 성서의 지명들을 고대의 언덕 수십 개 소에서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빈슨과 그의 후계자들은 성서 속의 지명과 현대의 지명을 비교 분석하면서 예루살렘, 헤브론, 야바, 벧스안, 므깃도, 하솔, 라기스 등 수십 개의 다른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해 나갔다. 19세기 말 영국의 ‘왕립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은 고도로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서 지명 확인작업을 추진하여 북쪽 요르단 강의 여러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의 네게브에 있는 브엘세바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전역의 세밀한 지형 지도를 작성했다. 이러한 지도를 바탕으로 자연환경과 지형조건은 성경 기록의 묘사가 거의 정확한 것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고고학의 발굴과 발견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내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의 표준적인 연대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노력은 성서 본문에 바탕을 두었다. 성경 속에 기록된 인물의 연대를 확인하는 데에는 성서 이외의 자료도 필요했다.

18세기 말 유럽 학자들은 놀라운 기념 건축물과 귀중한 상형문자 명문이 방대하게 보존되어 있던 이집트를 집중적으로 탐사했다. 기원전 1207년에 파라오 메르넵타가 세운 승전 기념비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민족에게 거둔 대규모 승리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보다 조금 후대의 파라오인 시삭(열왕기상 14:25)은 22왕조의 셰숑크 1세로 확인되었으며 그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원전 945년부터 924년까지 왕위에 머물렀으며 카르낙에 있는 아문 신전 벽에 이 원정 내용을 기록해놓았다.

1840년대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시작으로 나중에 미국과 독일이 가세한 학술발굴단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궁전, 설형 문자 등을 발굴해냈다. 이 제국들의 미술가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전쟁과 정치적 사건을 소상하게 기록해놓았다. 이리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왕들인 오므리, 아합, 예후와 남유다의 히스기야, 므낫세 왕이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서판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서 이외의 자료를 통해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를 더욱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위 여러 나라들의 통치시대를 비교분석한 결과 대단히 정확한 통치 연대가 작성되었다.

고대 요르단 왕국의 땅에서 19세기에 발견돼 모압 왕 ‘메사의 승전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군대에게 거둔 승리를 언급하고 있으며 열왕기하 3:4-27까지 기록된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에 관한 성서 외적인 중요한 증언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사실 확인에 가장 중요한 명문 하나가 북부 이스라엘의 텔 단 유적지에서 1993년 발견된다. 이 비문은 아람 왕 하사엘이 기원전 9세기에 이스라엘 왕과 ‘다윗 가문’의 왕에게 거둔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이로서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다윗 왕국에 대한 실존 여부가 확증되었다.

 

올브라이트와 성서 고고학

미국인 학자 윌리엄 팍스웰 올브라이트가 20세기 초에 개척한 성서 고고학은 대형 언덕(텔, tell)의 발굴에 주력했다. ‘성서 고고학’이라는 낱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32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였다. 그는 유럽 학자들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달리 성서와 외부 자료들을 결부시킴으로써 성서를 더욱 역사적인 문서로 확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가 뒤이어 고고학을 발전시켜 1955-70년대에 성서 고고학의 전성기를 만든다. 올브라이트-라이트-브라이트로 이어지는 올브라이트 학파는 고고학을 성서학의 일부로 인식하여 성서 본문과 고대 근동학의 모든 측면들을 때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결합시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 이르자 많은 고고학자들의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 심지어 라이트의 제자들까지도 스승의 학설에 의구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올브라이트와 같은 일군의 학자들은 성서의 역사성에 치중한 나머지 고고학 결과물을 편협하고 배타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교한 고고학적인 접근 방법을 갖추지 못한 채 적절한 존재 근거를 잃게 되었다. 발굴과 조사가 더 진행되면서 고고학은 이스라엘 및 근동 전체에서 밝혀진 사실과 성서에 기록된 세계사이에 물질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는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고고학적인 발견과 성경의 기록 사이에 어긋나는 점은 더더욱 많았다.

 

 

 

성서와 고고학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을 놓고 근본적으로 상충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한 성경 원본 비평가들과 성서 고고학자들은 두 개의 격리된 지적 세계에 계속 살 수 밖에 없다. 성서 비평가들은 성서를 계속 해부의 대상으로 보았다. 초기에 고고학자들은 성서의 역사 관련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인 자료를 팔레스타인 지역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독립적인 자료로 사용하지 않고 성서 기록에 계속 의존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새로운 사조가 성서 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결국 유물과 성서 원본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성서의 땅에서 탐사 활동을 벌인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유물을 성서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포기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인 방법을 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서 원본의 배경이 된 고대의 생활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고대 유적지를 발굴할 때 대상 유적지의 성경 관련 부분에만 역점을 두었던 관행은 사라졌다. 각종 동물의 뼈와 곡물의 씨앗, 토양 견본의 화학적인 분석, 세계의 수많은 문화에서 도출된 각종 장기적인 인류학적인 모델은 물론 발굴된 유물과 건축 및 정착 유형 등이 더욱 폭넓은 경제 변화, 정치 역사, 종교와 풍속, 인구 밀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이제 성서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협력 속에서 성서 속의 삶과 신앙과 이야기들이 더욱 밝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고학은 성서의 배경이 된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출애굽,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 요시야, 포로기 이야기 등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데 탁월한 공헌을 한다. 성서와 고고학의 협력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웨를 향한 그들의 신앙을 더 쉽게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성서 고고학의 한계

- 도기 연대 측정 또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과 같이 몇몇 폭넓은 제한들을 넘어서 성서 시대의 본문들에 보다 더 의존하는 연대 결정

- 고고학적 기록에서의 민족성에 관한 모든 문제(예를 들면, 블레셋인들 또는 이스라엘인들은 도기들 또는 건축물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비교되어야 하는가)

- 파괴 지층들을 문헌 자료들에 기술된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결부시키고자 하는 정치사

- 역사적 또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본문들의 의미의 확증

- 계속된 발굴과 조사를 통한 새로운 발견에 따른 새로운 결론.

- 사회사, 경제사와 달리 정치사, 종교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

- 물질 문화를 다른 것으로, 그 물질을 남긴 특정한 행동양식을 밝힐 뿐이지 행동 이면의 사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성서 고고학의 공헌

- 성서 고고학은 성서 사건들의 일반적인 배경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문화 간 비교들을 위한 무한정의 가능성들을 제공해주는 고대 근동의 민족들과 장소들을 광범위하게 복원해 준다.

한 세대 전만해도 블레셋 인들은 성서 이외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지금은 동시대의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문화보다 더 확실하게 그들의 물질문화의 특징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 고고학은 성서의 이야기들이 제공해주지 않는 사건들의 구체적인 시공간적, 문화적 배경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초기 이스라엘 국가가 가나안에서 생겨났을 때의 복잡한 문화 환경, 이스라엘의 몰락을 재촉하였던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의 정복 전쟁들의 영향, 히브리 선지자들이 메시지를 선포했던 당시의 사회 경제 종교적 삶의 자리, 예수 시대에 있어서 국제도시 예루살렘과 갈릴리 디아스포라들의 다문화적인 삶을 자세히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 유물들을 보완해 줄 물질문화의 풍부한 유물들을 제공해준다. 도시계획과 행정, 수비, 무기와 기구들, 왕실 및 가정의 건축물, 성서들, 괴상한 제의 대상물들, 무덤들, 도기, 사치품과 수입품들,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상아와 봉인들, 놀랄 정도로 늘어가는 토기 단편들 및 그밖에 금석문 자료들. 이 모든 것은 성서 본문들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성서 시대의 일상생활을 조명해 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경제적 조건들, 종교와 철학, 예술과 문화, 기술, 통상, 국제 관계의 폭넓은 문화적 배경을 알려준다.

- 고고학은 점점 더 성서 본문에 나오는 설화들과 사건들을 다른 관점-반드시 모순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뜻에서는 수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에서 보게 해 준다. 놀랍게도 시내 반도의 쿤틸렛 아주루드에서 주전 8세기의 호합신앙적인 성소를 발견함으로써, 고고학은 민간 신앙을 밝혀주었고 이제까지 의문시되어 왔던 반문화(counterculture)를 언뜻 보게 해주었다.

- 예기지 않은 발견을 통해 전승과정에서 훼손되었거나 모호한 특정한 성서 본문들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보강 증거를 마련해줄 수 있다. 성서학의 앞날은 대체로 개선된 역사적, 본문 비평적 연구와 더불어 고고학의 팽창하는 정교화-특히 사회학과 인류학 이론의 사용 및 설명적 잠재력의 증대라는 면에서-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 올브라이트가 오래 전에 관측했듯이, 성서를 그 원래의 배경 속에 놓아두게 되면 성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더 믿을 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서는 더 인간적이고 덜 신적인 듯이 보이겠지만, 그것은 신앙 자체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서 본문과 고고학 유물에 대한 해석은 신앙의 문제-곧, 지식의 문제임과 아울러 직감과 공감의 문제-이다.

 

결국 일차적인 자료는 성서의 본문임이 분명하다.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페르 롤랑 드보(Pere Roland de Vaux)-고고학의 사용에 있어서 신앙과 비평학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면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은 결코 없었다-는 이렇게 말했다(1970:78)

 

우리는 언제나 본문들로부터 시작하여 성서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본문들은 문학비평, 전승비평, 역사비평의 방법론들에 의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고학은 있는 무엇이 본래의 모습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을 확정해주지 못하고, 단지 우리가 본문에 부여하는 해석을 확증해 줄 수 있을 뿐이다.





[ 이 글은 '은혜의 해가 떠오르는 새들녘교회' (http://sdnchurch.onmam.com/1624333) 에서 옮겨온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