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성경(구약)을 보는눈(8) 본문
성경(구약)을 보는 눈
김근주(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기독연구원 느헤미야)
㉡ 인종분리와 흑인 차별의 근거로서의 본문
그럼에도 이러한 본문들이 인종의 우월성이나 격리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정당한 해석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편파적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남아프리카에서 이러한 해석이 유행했다는 점도 성서해석이 현실의 기득권 옹호를 위해 남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는 본문을 읽는 그대로 읽을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가령, 창세기 1장은 "각기 종류대로"를 여러 번 사용하면서 생물이 각기 분리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역시 "땅에 편만하라"라는 점에서 땅에 흩어지고 땅 전체를 채우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아의 후손들에 대한 본문들은 흩어져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정한 질서임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된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 "노아의 이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9:19);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0:5; 이와 비숫한 구절로 10:20,31). 흩어져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본문은 바벨탑에 관한 11장일 것이다.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창세기 11장 9절은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본문들을 그 강조되고 반복된 표현을 따라 읽는다면 인종간의 분리와 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읽을 여지가 잇게 된다. 그래서 인종분리에 대해 창세기의 내용들이 실질적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분명 하나님은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서로 다르게 지으셨다. 하나님의 창조의 다양함과 각각의 아름다움이 서로의 철저한 분리에 기여하고 사용됭다. 나아가 일체의 섞임에 대한 반대 이론으로도 활용되면서 인종 차별과 인종 격리의 근거로 사용된다. 함께 살아가는 다인종 사회는 사실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바울의 신학에 가서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라는 고백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지구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언어의 장벽도 그리 장벽이 아니게 되었다. 바벨탑 이전의 시대가 된 셈이다. 인종 격리의 근거가 성경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노아 시대의 몇 안 되는 민족의 분리를 생각한다면, 그 이후 수많은 인류와 민족들의
역사는 결국 노아 시대를 따른 구획으로는 부족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노아의 본문의 상징성을 생각할 때, 이의 문자적인 적용은 편파적인 성경 사용을 초래할 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 역시 종족 간 결혼으로 이해되었다. 그에 비해 노아는 종족의 순수성을 보존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종족 결혼을 행한 이들을 세상에서 홍수로 심판하셨다. KKK 역시 노아 홍수에 대해 아렇게 해석하였단다. 신 32:8; 행 17:26에 따르면 각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민족들은 따로 구분되어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본문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을 통해 각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 민족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도 당장 다른 민족의 구역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잇으며, 이미 그 땅에 와서 살고 있는 수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민족간 격리에 대해 사도행전 본문이 말하고 잇다고 볼 수 는 없다. 실제로 이러한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일체의 이주와 민족의 이동이 모두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 살아야 햇으나 그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유대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과 애굽에서 흩어져서 살아야 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심판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심판과 무관하게 이주한 경우들도 있다. 그마저도,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주에 아무런 심판의 의미가 그러져 있지 않다.
흩어짐이 하나님의 뜻이고, 인종간 결혼이 그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사실 무엇보다도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야 한다. 바벨탑 본문은 명백히 언어의 혼잡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보여준다.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하심으로 그들을 흩어지게 하였고, 바벨탑 같은 거대한 인력 동원 사업을 불가능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를 살린다면 다른 언어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본문들이 인종분리 정책의 성경적 근거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본문의 내용들이 해석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문자적인 읽기의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기본적인 상식일 수 있다. 창세기 본문이 노예제도와 인종분리에 기여했듯이, 유대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복음서와 이사야서 본문들은 유대인 학살에 기여하기도 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일단 모든 해석이 상대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다음에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 상대성을 극복하여 보편타당한 진리로 성경의 말씀을 정립할 것인가일 것이다. 다양한 상대적인 해석의 한게를 극복하기 위해서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원리 혹은 원칙에 견주어 개별 본문을 살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바를 발견하는 것 역시 주관적이기 쉽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교회 역사를 통해 우리 교회가 고백해온 전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전통의 힘과 역할이 있다. 아울러 상대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보편타당한 상식에 견주어 해석하는 것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보편타당한 상식 역시 시대적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인류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고 확인된 점들에 유의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것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연결된다고 할 것이다.
→ 진리에 대한 진지함과 비판적 자세 : 행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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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인교회(http://www.yein.org/)에서 지난 3월 6일 진행된 "성경강좌 - 성경의 올바른 사용" (김근주 교수)의 강의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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