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해석학적 우상숭배 본문
로마서는 바울이 쓴 편지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편지를 바울의 글로 읽는다.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실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읽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대부분의 로마서 독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이 로마서를 읽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울의 글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읽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저자가 바울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면 독자 또한 정체를 바꾼다. 로마서의 독자는 더 이상 1세기 로마의 신자들이 아니라 마로 지금의 나다. 결국 우리는 로마서를 '오래전 로마인들을 위한 바울의 편지'로가 아니라 '지금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그렇다고 로마서가 바울의 글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바울 아니라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큐티(quite time)로 알려진 개인 성경 묵상이 좋은 예가 되겠지만, 성경 읽기에서 신자들의 관심은 로마의 신자들을 행한 바울의 말이 아니라,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과 로마 신자들 사이라는 본래의 정황이 사라지면서, 이제 바울의 텍스트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시기 위한 일종의 코드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내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바울이 엣날 로마인들에게 했던 말이 지금 나를 위한 말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게 바꾸는 것은 나다. 그러니 무리가 따른다. 가령 "제가 여러 번 여러분들에게 가려고 했던 것을 아셨으면좋겠습니다"(1:13)라는 구절을 읽었다고 치자. 실제로 어떤 신자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여러 번 자신을 찾아오려 했지만 좌절하셨구나 하는 '말씀'을 읽어 내고 자신의 완고함을 회개한다. 물론 이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초청을 여러 번 거절한 체험이 잇을 수 있고, 따라서 그는 이 구절이 자신의 고집을 꾸짖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성경 읽기가 늘 이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나를 스페인으로 보내 주면 좋겠다"(15:24)는 대목에 오면 그럴듯한 의미를 찾기 어렵다. 물론 영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 삶의 "스페인"을 포착해 내고, 하나님이 그리로 가실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고 결신할 수도 있지만, 이쯤 되면 우리의 읽기는 '꿈보다 해몽'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물론 이 해몽은 전적으로내 마음이다. 어차피 바울의 본래 의도가 무의미한 상황이니 그냥 내가 그럴듯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을 재료로 삼기는 했지만, 실제 조리되어 나온 음식은 나 자신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해석학적 우상숭배라 부른다.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불렀던 이스라엘처럼, 내 생각의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는 형태다.
성경을 빙자햇다는 사실 말고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말할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을 내 생각이 투영되는 거울로 삼고, 본문의 이름으로 나 자신의 생각을 '발견'한 것뿐이다.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든, 골방에서 하는 묵상이든, 오늘날 교회의 성경 읽기는 많은 부분 이러한 해석학적 우상숭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내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은혜'받는 데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식의 자의적 해석과 자기도취적 감동이 초월적 은총일 가능성은 적다. 진정으로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초월의 음성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우리 교회가 이토록 무력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은 아닐까?
(로마서 산책/권연경/복있는 사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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