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벧전 3:19에 나타난 예수님의 “음부강하”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벧전 3:19에 나타난 예수님의 “음부강하”

에제르 2011. 9. 19. 14:04

최근 고신교단에서는 사도신경에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추가하였다. 이 고백은 벧전 3:19의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에 근거한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사도신경의 고백과 벧전 3:19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양자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이 글을 통하여 벧전 3:19을 주석함으로써 사도신경의 고백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문맥

벧전 3:19이 위치한 문맥은 3:13-22인데, 이 부분은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한 언급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권면하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는 18-22절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예시하는데, 이는 베드로전서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다(예. 2:21-25). 즉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신자들이 불의한 자들에 의해 고난 받는 것의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주해: 18-19절

18절: 이 구절에서 해석하기 까다로운 표현은 마지막에 나오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having been put to death in the flesh, but made alive in the spirit)이다. 이것은 많은 학자들의 주장대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보인다(예. Beare; Kelly; Selwyn). 이 문장에서 두 개의 수동태 아오리스트 분사구가 대조를 이루며(“죽임을 당하시고”[thanatōtheis]; “살리심을 받으셨으니”[zōopoiētheis]), 두 개의 여격 명사가 대조를 이룬다(“육체로는”[sarki]; “영으로는”[pneumati]).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여 육체는 죽었고 영혼은 살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베드로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상에 기초한 문예 기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육체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영으로는”)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과 육의 대조를 통하여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19절: 이제 논의의 핵심이 되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in which he went and proclaimed to the spirits in prison)는 말을 주해해 보자.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분석할 수 있다.


1) 문장의 초두에 있는 선행사 en hō(in which; 개역개정판에서는 번역이 생략됨): 이 표현은 18절b(부활)와 연관되어 다양한 의미로 번역(해석)이 가능하다. “영으로”, “부활하신 후에”, “부활하신 상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의미는 모두 동일한데, 곧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2) “또한”(kai):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여러 곳을 다니셨다.

3) “가서”(poreutheis): 아오리스트 분사인데, 이 단어 자체로서는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지 내려가는 것을 말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그러나 요 14:2, 3, 28; 16:28; 행 1:10-11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 문맥을 통해서 파악해야 한다.

4) “옥(phylakē)에 있는 영들(pneumasin)”: “영들”이라는 단어 자체는 다양한 뜻을 가진다. 몸, 영적 측면, 악령, 성령, 바람, 호흡 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영들이 누구인지는 문맥에서 결정해야 한다. 이어지는 20절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홍수를 경고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종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노아 시대의 타락한 천사들이거나 불의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양자이다.

5) “선포하시니라”(ekēryxsen): 아오리스트로서 “선포하셨느니라”(proclaimed)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선포하셨다는 뜻이다(승리의 선언, 심판의 선언).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영들”(spirits)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Dalton과 Brox는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1 Enoch 21:6, 10), Beare와 Goppelt는 노아 홍수 때 죽었던 불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Reicke와 Windisch는 두 부류를 모두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한 천사들이라고 생각한다.


1) 신약성경에서 복수형 “영들”은 인간에 대하여는 한번만 사용되었고(히 12:23: 집합적으로 “영들”이라고 함), 대부분의 경우에는 초자연적인 존재들(마귀들)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예. 마 8:16; 10:1; 12:45; 막 1:27; 5:13; 6:7; 눅 4:36; 6:18; 10:30; 행 5:16; 엡 2:2; 딤전 4:1; 요일 4:1; 계 16:13-14).

2) 이어지는 20절이 노아 홍수를 언급하는 점과 베드로가 벧후 2:4-5에서 노아 홍수와 타락한 천사를 연결하는 점을 볼 때 이들은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생각한다.

3) 성경에서는 “옥”이라는 단어가 인간이 죽은 후에 갇히는 곳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단어는 사탄(계 20:7)과 타락한 천사들(벧후 2:4)을 가두어 두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유 1:6과 벧후 2:4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심판의 날까지 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4) 비록 비정경적 문헌이긴 하지만, 에녹1서(1 Enoch)는 타락한 천사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언급하며(21:6), 그들에게 심판의 선언이 주어진다(16:3)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여러 곳에 다니셨는데, 그 중에서 노아 시절 불순종했던 천사들이 갇혀 있는 곳(옥, 음부)에 가셔서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심판을 선언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순서의 문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장사지낸바 되신 후에 음부(옥)에 내려가셨다는 순서와 벧전 3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옥(음부)으로 가셨다는 순서가 다르다는 점이다. 즉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님의 여정은 죽음-> 장사 -> 음부강하 -> 부활 -> 승천인데, 벧전 3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여정은 죽음 -> 부활 -> 음부강하 -> 승천인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벧전 3:19이 사도신경의 음부강하 고백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베드로는 시간의 순서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수난과 부활을 “영”이라는 주제어로 연결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즉 베드로는 3:18에서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는데”라는 말을 하면서 19절에서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라고 하여 “영으로”를 연결고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과 음부강하는 시간적인 순서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절 이하에서 물이라는 매개체를 가지고 노아 홍수 때의 물과 신약시대의 세례 때의 물을 대조하듯이, 18절b-19절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육”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영”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음부강하를 말한다.


신학적 메시지

결국 벧전 3:19는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지지하는 본문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교리문답이 말하는 측면과 조금 다르다.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은 예수님의 음부강하를 고통의 측면에서 해석하지만, 벧전 3:19은 승리와 심판 선언의 측면에서 이해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그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옥(음부)에 가셔서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와 그들에게 임할 영원한 심판을 선언하셨다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듯이 예수님의 음부강하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묘사는 벧전 3:13-22의 요지와 잘 어울린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권면한다. 특히 그는 예수님의 승리를 신자들의 승리의 근거로 삼는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셔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승리하신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승리자의 소식을 전하면서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 08월 19일


 
  






▲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Ph.D.신약학)
   코닷연구위원





[ 이 글은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에서 옮겨 온 황원하 목사님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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