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비유의 핵심 요점을 찾는 지침 본문
비유의 핵심 요점을 찾을 때 유용하다고 증명된 몇 개의 질문이 있다.
1) 누가 주인공인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비유에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둘 혹은 셋이 있다. 다수의 인물을 셋으로 줄이는 줄이는 것은 대개 상당히 쉽다. 예를 들면 탕자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세 인물은 분명히 아버지, 탕자, 큰아들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도 세 인물군이 중요한데 포도원 주인, 이른 아침에 온 품꾼, 제 십일 시에 온 품꾼이다. 이 비유에서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에 ㅇㄴ 품꾼은 중요한 인물이 아닌데 그들은 저녁때 회계하는 시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인물 중에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예수와 복음서 기자가 강조하려 했던 특정 인물에 주목할 수 있다.
2) 어떻게 끝나는가?
어떤 학자는 이 지침을 "종결강조의 법칙"(the rule of end-stress)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좋은 이야기는 중요한 것을 종결부분에 위치시키고 초점을 맞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좋은 추리소설은 모든 것이 설명되고 분명해지는 끝부분까지 독자들이 긴장으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한다. 비유는 그와 비숫한 방식으로 강조점과 핵심을 이야기의 끝에 배치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 에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종결되면 요점은 달라질 것이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먼저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나중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나중 온 자들이 와서 덜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놀라며 집 주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를 말했다면 초점은 끝에 있는 자비의 행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이 자비롭고 선한 분이라는 점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비유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처음 온 자가 원망하는 것으로 비유를 마친다. 이 지점이 바로 예수님이 청중의 관심을 모으려 한 곳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이 비유의 요점은 처음 온 자의 반응에 그 중심이 있다. 이 그림 부분이 강조되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지목한 실재는,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들에게 구원을 자비롭게 제공한 것에 대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인정하고 함께 즐거워 하기를 꺼려하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와 큰아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3) 직접화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비유에 대화가 있다면 독자들은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주인과 제11시에 온 품꾼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상당한 대화가 주인과 처음 온 품꾼 사이에 이루어진다(마 20:11-15).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탕자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다. 실제로 그 아들의 말은 심중에 말하고 그것을 읊지만(눅 15:18-19,21) 아버지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는 상당한 대화가 있다(29-32절). 이 두 경우에서 예수님은 청중의 관심을 이 대화에 모은다.
4) 누가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가?
이야기를 말할 때 대체로 우리는 중요한 인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묘사한다. 사소한 인물들은 사소한 관심을 받고, 비중있는 인물은 비중있는 관심을 받는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처음 온 품꾼들에게 주어진 지면의 양(마 20:1-2, 10-15)을 고려할 때 처음 온 품꾼들이 제11시에 온 품꾼(6-7,9)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면상의 큰 차이점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비유의 요점이 처음 온 품꾼이 주인에게 보인 반응에 있다는 점이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이것이 분명하지는 않다. 탕자에게 배당된 지면은 열 세 구절(눅 15:12-24)이지만 큰아들은 여덟 절밖에 안 된다(25-32). 그러나 이 점은 큰 아들이 종결부분에 등장한다는 사실과 이 비유에 나오는 유일한 대화가 큰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안된다.
* 결론
비유해석의 열쇠는 비유가 확장된 풍유가 아니며, 하나의 기본 요점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그림 부분에 있는 기본적 유비(analogy)와 실제 부분에 있는 그 대응점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탕자의 비유에서 유비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허락한 사랑의 용서를 큰아들이 용납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세리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용서를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비유를 알레고리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기본 유비만 있기 떄문인데 모든 은유와 직유에는 하나의 기본 유비만 있다.
비유의 기본 요점을 찾는 과정에서 종종 다음의 질문들은 유용하다.
주요한 두 인물은 누구인가? 끝에 무엇이 나오는가? 누가 대화에 참여하는가? 누구에게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의미와(또는) 복음서 기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고 해서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는다. 해석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의미있는 함의를 찾아야 하고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만약 비유의 의미를 깨닫되 그 의미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함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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