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묵상으로 설교를 준비하라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묵상으로 설교를 준비하라

에제르 2009. 11. 5. 18:48
큐티 시간을 신실하게 갖고 큐티를 하다보면 설교 준비를 위한 많은 통찰력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큐티를 신실하게 하는 사람들은 비록 설교 준비를 위해서 큐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큐티를 통해 좋은 설교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큐티의 아름다운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하기 전 단계에서 큐티는 설교자 자신을 위한 묵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 포스터모더니즘 시대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 시대를 삼무三無의 시대라고 말한다. 첫째, 무관심의 시대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무책임의 시대다. 누구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셋째, 무감동의 시대다. 사람들이 어떤 일에도 감동 받지 않는다. 이런 무감동의 시대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철이 좀 지나간 유머이긴 하지만 이런 유머퀴즈가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목사님과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라는 퀴즈인데 정답은 ‘영감이 없다’이다. 어떻게 영감 있는 설교를 할 것인가? 나는 설교의 영감에 가장 중요한 원천은 묵상이라고 생각한다.

큐티는 결코 설교 준비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생각하면서 큐티를 하는 것은 그렇게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큐티는 큐티의 고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큐티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설교 준비를 위해서 만약 큐티를 하게 된다면 큐티는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어떤 기능적 작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큐티는 설교 준비에 중요한 마당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큐티 시간을 신실하게 갖고 큐티를 하다보면 설교 준비를 위한 많은 통찰력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큐티를 신실하게 하는 사람들은 비록 설교 준비를 위해서 큐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큐티를 통해 좋은 설교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큐티의 아름다운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하기 전 단계에서 큐티는 설교자 자신을 위한 묵상이다.

고전적 묵상의 4가지 단계

대체로 묵상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막교부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많은 노력들이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2세기에 와서 묵상을 위한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묵상의 4 단계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는데 오늘날 큐티 운동은 이 사람에게 영향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는 귀고 2세Guigo 2ed.로서 수도원의 원장이었는데 수도원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를 늘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창세기 말씀을 읽다가 야곱이 꿈에 사닥다리가 펼쳐지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위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읽게 된다. 그 장면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 가운데 사닥다리가 펼쳐진 것을 본다. 그리고 네 개의 단어가 이 사닥다리에 쓰여 지는 것을 보았다. 첫 번째는 ‘렉치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단어였다. ‘성경 읽기’ 또는 ‘거룩한 독서’라는 말이다. 두 번째 단어는 ‘메디타치오’meditatio로 ‘묵상하기’다. 세 번째는 ‘오라치오’oratio로 ‘기도하기’다. 이것이 사실 큐티의 모습이다. 성경 읽고 그 다음에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큐티다. 그러니 벌써 12세기에 큐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개신교 큐티 운동에서 한 가지 더 보안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귀고가 강조했던 마지막 네 번째가 오늘날 별로 강조되지 않고 있다. 네 번째 단어가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이다. 이 단어를 번역할 때 가톨릭에서 ‘관상’이라고 번역했다. 관상은 쉽게 말하면 ‘깊이 바라봄’이다. 하나님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바라보는 것이 다. 큐티 안에 이 부분이 접목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네 가지 단계를 생각하면서 간략하게 큐티와 설교와 관련해서 언급하겠다. 렉치오 디비나에서 첫 번째 할 수 있는 일은 소리 내어 본문을 읽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세 번 읽기를 강조한다. 처음에는 큰 소리로 읽고 두 번째는 조금 작은 소리로 읽고 세 번째는 아주 작은 소리로 읽고 그 다음에는 침묵하면서 읽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한 가지만 하면 된다. 이 본문의 줄거리가 무엇인가, 본문의 핵심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메디타치오, 곧 묵상하기 단계로 넘어간다. 메디타치오는 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을 묵상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약의 가장 큰 계명을 강조하시면서 마음을 다 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선배들이 묵상의 마무리를 어떻게 했냐하면 묵상한 본문 속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단어는 본문에 있는 단어일 수도 있고 본문에는 없지만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는 한 단어일 수도 있다. 그런 단어를 ‘거룩한 단어’ 혹은 ‘기도의 단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그 단어를 가지고 기도하고 하루 종일 묵상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오라치오로 들어간다. 기도라는 것은 두 가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인간의 필요 나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된다. 이런 기도의 샘플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가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필요에 집중되어 있는 기도다. 나의 기도를 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하나님의 필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필요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다음에 인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게 되면 네 번째 단계로 들어간다. 콘템플라치오에 들어가는 방법은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조 혹은 관상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패스워드와 같다. 그런데 왜 여기서 침묵이 필요하냐 하면 침묵할 때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관상 기도의 핵심이 침묵 기도인데 한국 교회가 통성 기도와 침묵 기도가 균형을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통성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통성 기도의 파워를 잘 알지만 통성 기도와 함께 때때로 우리에게 침묵 기도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콘템플라치오는 두 가지의 단계를 갖는다. 첫 번째를 유념적 묵상이라고 하고 두 번째를 무념적 묵상이라고 한다. 처음 묵상의 단계는 생각을 떠올리고 상상을 떠올리며 묵상하는 것이다. 처음 묵상의 단계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비우려고 해도 비울 수가 없다.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속 썩이는 교인들도 떠오르는 것이다. 그 상상을 성화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념적 묵상의 단계는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가르쳤던 훈련 가운데 본문을 창조적으로 되새김질하기가 있다. 본문에 있는 사건들을 조용히 침묵하면서 영화처럼 그려보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서 중요한 사건을 보도하는 본문들을 볼 때 그 본문의 모습을 상상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하나님의 안식의 체험 단계다. 이때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머물면서 내 욕심, 분주한 생각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는 것이다. 충분히 우리의 이런 생각들이 내려놓아지면 내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빌립보서 4장 1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붙들고 다스리는 모습을 어떤 영성학자는 비바람이 불고 난 후의 조용해진 연못의 고요와 투명한 빛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붙들고 있는 마음의 상태는 그와 같다.
그 다음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도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가 견고히 마음을 지킬 때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결코 두려운 마음이 아니다. 조용한 침묵 속에 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비로소 우리는 무념적 묵상을 할 수 있다. 무념적 묵상은 생각을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생애에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들려오고 새겨지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묵상은 끝나는 것이다. 내가 설교 준비를 위해서 큐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묵상을 했을 때 그것들이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큐티를 가지고 설교에 적용하기

나는 보통 설교 준비를 한 주간 내내 하지만 유일하게 설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주일 밤일 것이다. 그러나 월요일 오전이면 다음 주에 설교할 텍스트를 정한다. 그러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계속 본문을 읽는다.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한다. 이 본문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 핵심이 어떻게 본문에 정리되어 나타나는가. 이것을 가지고 나는 내 설교에서 어떻게 아웃라인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설교의 제목을 만들 것인가 등이다. 보통 목요일 아침에 교회 사무실에 제목과 본문을 보내는데 그때 이미 설교의 제목과 그리고 설교의 아웃라인이 다 형성되어 있다. 그것을 다 묵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요일 오전부터 주석도 읽고 다른 분의 설교도 참고한다. 이렇게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내가 설교의 뼈대를 형성해야 설교의 전체 골격이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직접 들은 말씀과 음성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토요일 낮 12시까지 되도록 설교를 끝내고 토요일 오후에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이 말씀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함께 하도록 기다리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럼 설교 준비 단계의 묵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날마다의 큐티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를 다루지만 설교 준비 단계의 묵상에서는 청중을 위한 묵상을 하게 된다. 큐티가 내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면 설교 준비를 시작하면서 본문을 다시 묵상할 때는 청중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설교 학자들은 이 대목을 가리켜서 제사장적 청취라는 말을 쓴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데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설교를 들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의 입장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메인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다. 현대 강해 설교에 큰 영향을 끼친 해돈 로빈슨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설교는 산탄이어서는 안 되고 총탄이 되어야 된다.’ 그 메인 아이디어를 기초로 설교의 열쇠 문장을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전환 문장이라고 말한다. 열쇠 문장이 왜 중요하냐하면 이것이 설교 전체의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설교의 주제를 상기시키며 설교의 진행을 암시한다. 이것은 질문형으로도 할 수 있고 서술형으로도 할 수 있고 통합적 제시형으로도 할 수 있다.

묵상을 통한 설교문 작성하기

설교 아웃라인 작성의 중요한 원칙이 있다. 대지大志에 초점을 만들고 소지小志는 대지를 지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소지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에도 대지에 초점을 맞추게 해야 한다. 현대 설교에서는 현대인들이 점점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소지를 안 쓰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지를 써야 할 경우들이 있다. 그럴 때는 대지와 소지에 각각 하나의 내용을 갖게 한다.
서론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 역시 묵상을 통해서 할 수 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을 창조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고 그것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시대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본문의 주제를 매력적으로 제시한다. 본문에 핵심 되는 주제를 어떻게 잘 제시할 것인가. 예를 들어 집에서의 모임을 강조하기 위한 설교를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한다면 주제를 좀 매력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위해 영화 <집으로>를 가지고 묵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다음에 적용도 많은 묵상이 필요하다. 어떤 설교를 들으면 본문은 많이 설명하는데 적용이 없고, 또 어떤 분은 충분히 우리에게 실감나는 설교를 했는데 성경 말씀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는 두 가지 설교가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의 설교 속에서 본문에 관한 설명이 50%라면 적용이 50%가 되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문 설명을 하고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과 비슷한 오늘의 상황은 무엇인가를 계속 질문해야 한다. 만일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골리앗은 무엇인가를 묵상하고 만약 그것이 경제적인 고통이라면 어떻게 이 난관을 뛰어 넘을 것인가 질문하면서 이야기를 구성해 보는 것이다. 다른 책을 전혀 보지 않고도 묵상으로 이것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은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나는 결론에 있어서 두 가지 질문을 중시한다. 첫째,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이다. 이는 설교의 예언적 측면이다. 여기서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측면, 바로 잡을 것을 촉구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격려할 것인가이다. 이는 성경의 제사장적 측면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조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설교가들은 예언가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속사적 결론을 맺는 일이다. 그럼 구속사적 결론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해답은 결국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는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그 분은 우리의 유일한 해답이심을 전해야 한다. 그 구속사적 결론을 마무리하기 위해 설교자들은 묵상을 많이 해야 된다.

맺는 말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누어지고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시대가 새로운 소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말씀 묵상을 열심히 해서 이 시대를 밝히는 하나님의 사람, 위대한 설교자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동 원∥2009.6.


* 이 글은 "목회와 신학(http://www.duranno.com/moksin/) 6월호(두란노)"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疎通 2 (with YHWH) > Grasping Hi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의 본질  (0) 2009.12.26
구약 - 지혜서  (0) 2009.11.12
구약 - 선지서  (0) 2009.11.04
구약 - 시가서  (0) 2009.10.31
구약 - 율법  (0) 2009.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