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예수가 전한 하느님 통치 본문
1. 예수의 "하느님 통치"란 하느님의 세계 창조의 귀결로서 항상 존속하는 하느님의 세계 통치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즉, 완전히 실현된 최종적. 결정적인 하느님의 통치가 한 사건으로 "다가왔다" (마르 1,15)는 것을 의미한다.
2. 예수의 "하느님 통치"란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건설 또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최고 권능의 행사로 나타난다.
하느님이 그 "통치권"을 주고(루가 22,29-30), 하느님이 거기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약속한다(마태 5,3.10; 참조: 루가 6,20; 마르 10,14). 하느님은 확고부동하고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주권과 자유를 가지고 왕권을 행사한다.
3. 예수의 "하느님 통치"란 광범한 계층의 사람들, 특히 열성당원들이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하느님의 원수들과 싸운 것처럼, 현세적, 민족적, 정책종교적 신정(神政)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적 지배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통치는 정치적 권력과 현세적 재물의 왕국이 아니라 회개와 신앙을 전제로 하는 하느님의 통치다.
4. 예수의 "하느님 통치"란, 꿈란 교파를 포함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죄인과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복수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 복음은 권력자들과 부자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산상설교에서처럼, 특별히 가난하고 슬프고 천대받고 짓밟힌 이들을 위한 것이다. 또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히 죄인과 불경건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5. 예수의 "하나님 통치"란 사람들에게 어떤 개정된 도덕법규를 따르라는 요구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근본적 결단의 요구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통치냐, 현세와 현세의 통치냐라는 뚜렷한 양자택일의 요구다.
모두가,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두느냐 현세의 이익에 두느냐 하는 근본적 결단에 맞서게 한다.
다가오는 하느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현세와 인간의 죄악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한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하느님 통치를 기다리면서 하느님께만 일편단심을 바쳐야 한다.
현세 안에서 현세의 노예가 되지 않고, 나날이 이웃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느님과 그분의 요구에 언제라도 응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회개(metanoia, 마르 1,15)와 직결되어 있다. 회개는 하느님 통치의 선포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베옷을 입고 잿더미 속에 앉아 있는 그런 외적인 고행(苦行)이 아니라, 근본적, 전적인 내적 전환(轉換)이요 전인(全人)의 하느님에의 회귀(回歸)이다.
이 모든 것은 또한 "복음을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복음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회개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철저한 회개는 구원의 시대가 성취되었고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요, 철저한 신앙은 자기 자신의 죄와 은총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수행할 지세를 표현하는 회개에서만 가능하다.
다가오는 하느님 통치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것이다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마르 1,15)
[ 교회란 무엇인가 / 한스 큉 / 분도출판사/ p47~54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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