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F.F. Bruce) 책 요약 소개 본문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F.F.Bruce)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당시의 이방 세계에도 알려져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예수를 전혀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종교적으로 날조된 인물처럼 생각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밖의 세상에서 불신 세계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어떻게 알려졌던 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오래 전 일이라 자료들이 사라진 것도 있고, 간접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수의 역사성을 인식하게 해 주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 그것도 성경 밖에서 기독교를 적대시하거나 믿지 않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Ⅰ. 이방인 저자들의 증언
1. 빌라도의 보고서(행적)에 대하여
당시 황제에게 보내는 빌라도(Pontius Pilate)의 보고서가 남아 있다면 가장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에게 보내는 빌라도의 행정적인 보고서는 소실되고 지금 남아 있지 않다(언제인가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것이 한글로 번역되어 조그만 책자로 돌려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었으며, 그것을 열람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순교자 Justin(Justin Martyr)이 Antonius Pius 황제에게 헌정한 '기독교의 변호'(Defence of Christianity)라는 글(주후 150년에 썼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나 '악한 무리가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는 말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손과 발에 박은 못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달린 후에 그의 처형자들은 그의 옷들을 가지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고 그것을 그들 사이에서 나누었다. 이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당신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기록되었던 "행전"(Acts)으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Justin, First Apology 35. 7-9).
"그가 이 기적들을 행하였다는 것을 당신은 본디오 빌라도의 "행전"으로부터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48.3)
빌라도가 공식문서로 해서 보낸 보고서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그 속에는 예수의 기적사역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열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Tertullian과 한 두 세대 후의 변증가들도 주님의 탄생시에 실시 되었던 인구조사와 요셉과 마리아의 호적등록에 대하여 Augustus 시대의 공문서 보관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Tertullian, Against Marcion iv. 7. 19). 터툴리안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로 알려진 대학자였다. 신학적인 용어들과 신학정립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삼위일체'라는 말을 최초로 쓴 사람이며, 기독론 확립에도 중요하게 기여했다.
2. 수에토니우스(Suetonius)(로마의 저술가로서 주후 120년 경에 로마의 전기 12황제들의 전기를 편찬했다. 그는 Julius Caesar로부터 12황제의 전기를 기록했다)는 황제 "글라우디오의 생애"(Life of Claudius)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축출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Chrestus의 선동으로 끊임없이 폭동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주후 49년에 로마의 매우 큰 유대인 사회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과 관련된 진술이다(행18:2). 평범한 노예 이름인 "크리스투스"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오자였다. 아마도 자주 이런 식으로 오자로 기록되었던 것 같다.
수에토니우스는 네로 시대에 로마의 화제사건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졌던 형벌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기록했다: "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졌다. 이 일단의 사람들은 이상하고 해로운 미신에 탐닉하였다."(Suetonius, Nero 16.2)
3. Tacitus(수에토니우스와 동시대의 로마 역사가)는 그의 "로마 연대기"(Roman Annals:주후 115-117년 사이에 쓰여짐)에서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화재 책임을 덮어씌우려 했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악을 몹시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그리스도로부터 얻었다. 그리스도는 디베료(Tiberius)의 치하에서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이것은 이 유해한 미신을 잠깐 동안 중지시켰다. 그러나 이 염병이 처음으로 발생했던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로마 안에서도 다시 일어났다. 로마에서는 세계의 모든 무섭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모이고 그 근거지를 발견한다."(Tacitus, Annals xv. 44)
유명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의 처형이 디베료 황제 치하에서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의해서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처형은 역사에 없는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가의 역사가 증언해 주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 시대에 로마에서 얼마나 번성했던 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빌라도의 처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더욱 번성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과 성령의 계속되는 사역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4. 플리니(Pliny)와 비두니아의 기독교
플리니도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와 동시대 인물이다. 그는 편지 쓰기로써 세계에서 유명한 문학가가 되었다. 후에 그의 편지는 문학적인 하나의 양식(genre)이 되었다. 그의 편지는 수신자의 숙독을 목표로 폭넓은 일반사회를 염두에 두고 쓰였고, 그로 인하여 문학적 고전의 위치를 얻었다. 합해서 10권의 서신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숙부 플리니(Natural History의 저자로서 이것 역시 문학적인 고전이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소 플리니라고 불리운다. 그의 서신 중에 트라얀 황제(주후98-117)에게 보낸 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111년경에 로마의 속주 비두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총독으로서 사사건건이 황제와 서신으로 연락하면서 알리고, 의견을 묻고, 황제의 지시와 대답을 들었다. 소방대 조직과 관련된 트라얀 황제의 답장에 이런 내용이 있다:
"소방대를 조직해서는 안된다. 적절한 방침은 각 재산 소유자와 세대가 항상 이용할 수 있는 방화 장비를 소유하여 화재가 너무 멀리 번지기 전에 진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소방대로 인한 두통거리는 단순히 이것이다. 즉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어떤 조직은 그 원래적이고 표면상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조만간 파괴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진 비밀 결사에로 발전할 것이다."(Pliny, Epistles, x. 34)
여기 '비밀 결사'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의 종교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이다. 2세기 초 비두니아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모임이 위험시되었음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가운데서 살았다.
황제와 교신하는 플리니의 긴 서신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즉 그들은 어떤 일정한 날에, 동트기 전에 모여서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번갈아 부르는 찬송을 부르는 습관이 있고,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종류의 절도, 강도와 간음을 삼가고, 믿음을 존중하도록 요청될 때 믿음의 파괴나 신앙의 부인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것 후에 그들은 헤어진 다음, 음식 곧 평범하고 순결한 종류의 음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다시 모이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고 그들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까지도 저의 포고령의 공표 이후에 그들은 행하기를 포기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 포고령에서 저는 당신의 지시에 따라서 사적인 집회를 금지시켰었습니다. 그런 후에 저는 두 여자 노예들을 고문에 처함으로써 이 사건의 실제적인 진실을 조사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집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한계를 넘어간 부당한 미신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고소된 자들의 수효 때문입니다. 모든 연령, 모든 계층, 남녀의 다수가 고소되고 고소될 것입니다. 이 전염성을 가진 미신은 도시들뿐만 아니라 마을들과 시골에 퍼졌습니다..."(Epistles x. 96).
이에 대하여 믿음을 버리고 다시 황제 숭배로 돌아오는 자는 어떤 형벌도 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답신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들의 처리에 대하여 어떤 법령도 만들 수 없음을 황제는 말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찬송했다는 점, 범죄하지 않았다는 점, 믿을 때에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점, 음식 즉 성찬을 나누기 위해서 다시 모였다는 점, 노예 출신 여집사들이 고난을 당했다는 점, 시골까지 신자들이 퍼져 있었다는 점 등이 유의해 볼 점이다.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일하고 계셨고, 로마 황제와 총독을 통해서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사심이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데 박해 속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5. 탈루스(Thallus)와 아프리카누스
탈루스는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서 디베료 황제에 의해서 해방을 얻은 노예였다. 그는 주후 52년에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자기 시대까지 동부 지중해 세계의 역사를 썼다. 이 역사서는 사라졌지만, 기독교 저자(연대학)인 Julius Africanus에게 알려졌다. 아프리카누스는 3세기 초반에 살았던 사람이다. 아프리카누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동반되었던 지진과 불가사의한 암흑을 서술하면서, 탈루스가 그의 세 번째 책에서 그 현상을 일식으로 설명했다고 말한다. 아프리카누스는 탈루스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때는 만월이었기 때문에 일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6. 마라 바르 세라피온(Mara bar Serapion)
대영 박물관에는 주후 73년 약간 후에 쓴 세라피온의 편지 본문이 어떤 수리아 사본에 보존되어 있다. 그는 옥중에 있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지혜를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편지를 썼고, 현인들을 박해한 후의 세상이 불운을 만났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로 들고 있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후에 무슨 이득을 얻었는가? 기근과 역병이 그들의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들에게 엄습하였다. 사모스(Samos) 사람들은 피타고라스를 화형시킴으로써 무슨 이득을 얻었는가? 순식간에 그들의 땅은 모래로 덮히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현명한 왕을 처형함으로 무슨 이득을 얻었는가? 그들의 왕국이 멸망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신들은 정당하게 이 세 현인들의 복수를 해 주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었고, 사모스 사람들은 바다에 삼키었고, 유대인들은 멸망하고 그들의 땅으로부터 축출되어 완전히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그는 플라토(Plato)의 가르침 속에 살아 있다. 피타고라스는 영원히 죽지 않았다. 그는 헤라 여신상 속에 살아 있다. 이 현명한 왕도 영원히 죽지 않았다. 그는 그가 준 가르침 속에 살아 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역사 속에서 사셨던 인물로서 이방 세계의 사람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II. 유대인 요세프스(Josephus)의 증거
요세프스는 주후 37년경에 유대인 저명한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 자신의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조숙한 청년으로 명철한 사람이었다. 유대인 네 종파중에서 그는 세 개, 곧 사두개인, 에쎄네파, 바리새인의 시험을 차례로 치루었고, 26세에 로마에 대표로 파견 되었고, 거기서 로마 제국의 힘을 알게 되었다. 그가 로마에 간 때가 63년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66년에 로마에 대한 민족적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로마 항거에 탁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갈릴리 반란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결국 67년에 반란이 분쇄되었을 때 그는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은 베스파시안 앞으로 끌려 갔다. 그는 죽음을 당할 상황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요세프스는 베스파시안에게 언젠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베스파시안은 요세프스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의 말이 사실로 이루어지는 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2년 후에 실제로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베스파시안은 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했다.
요세프스가 이런 예언을 한 것은 우리가 보면 좀 웃기는 일이다. 요세프스가 이런 예언을 한 근거는 창세기 49:10을 근거하였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예언을 요세프스는 베스파시안에게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가 베스파시안이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그랬는지, 아니면 사람 유다를 지역 유다로 읽고(사실 같은 것이니까) 거기 와 있는 진압군 사령관을 왕이 될 것이라고 둘러대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베스파시안이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혹은 요세프스가 다니엘의 70 이레 예언이 그 때쯤에 성취될 것이라고 계산하고 베스파시안을 다니엘이 말한 "장차 올 한 왕"과 동일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의 후반부 생애를 요세프스는 로마에서 연금을 받으면서 유대인의 명성을 위해서 저술에 몰두하면서 살았다. 그는 자신이 유대민족을 위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살면서 유대인을 변호했다. 그래서 그의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20권이 나왔다. 이 중 18권 63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면, 이 무렵에 예수라는 한 현인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쁨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수많은 이방인들을 그에게 모이게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의 제의에 따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정죄하였을 때도 처음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제 삼 일에 다시 살아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적인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런 일들과 수많은 다른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던 대로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종족-그리스도로부터 그렇게 명명된-은 오늘날까지 소멸되지 않았다."
요세프스의 이런 기록은 아주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증언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사실적이고 실제적이다.
III. 슬라브어판 요세프스
요세프스는 로마의 연금 수령자로서 생활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 그 때가 주후 70년 이후였다. 즉 예루살렘이 망한 후였다. 그가 로마에 가서 저작생활을 시작하면서 쓰기 시작한 첫 작품이 유대 전쟁사였다(History of Jewish War). 이것은 주후 66년에 로마와 유대 사이에 전쟁을 발발하게 한 사건들과 73년 유대 마사다 요새의 피습까지의 전쟁 과정을 담고 있다. 이것을 쓴 목적은 로마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어서 사람들이 로마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주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위한 아람어판과 더 후에 일반적으로 읽히도록 하기 위한 헬라어판으로 발간되었다. 헬라어판은 남아 있으나, 아람어판은 남아있지 않다.
이 헬라어판이 주후 11-12세기에 슬라브어판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즉 고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리고 오랜 후 1906년에 이 고대 러시아어판에서 부분적으로 발췌되어서 독일어로 번역되어 출판됨으로 서양세계에 슬라브어판 유대전쟁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속에 세례 요한과 예수와 및 신약의 다른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문제는 슬라브판에 나오는 세례 요한과 예수 등의 이야기들이 요세프스 헬라어판에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요세프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문체적인 특징상 누군가에 의해서 후대에 헬라어판에 삽입되었다가 슬라브어로 번역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것은 요세프스가 직접 쓴 것이 아닌데 희랍어로 된 요세프스 전쟁사에 삽입되어 있다가, 고대 러시아어판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중요한 전승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읽어 볼 가치가 있다:
"그 때에 어떤 한 인간이 나타났다. 만일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하다면, 왜냐하면 그의 본성과 모습은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외관은 초인간적이었고 그의 활동은 신적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단순한 한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공유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나는 그를 천사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그는 볼 수 없는 능력을 통해서 수행한 모든 일들을 말씀과 명령에 의하여 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첫 율법 수여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였다. 그리고 그는 표징과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되었다고 생각하였다...그는 그의 손으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그의 말씀으로만 행하였다.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그의 가르침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를 통해서 유대 지파들이 로마의 세력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시 밖 감람산 위에 머무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거기서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치료를 행하였다. 150명의 보조자들이, 그리고 민중이 그와 결합하였다. 그들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 한 마디에 의하여 성취하는 그의 능력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가 이 도시에 입성하여 로마 군대와 빌라도를 타도하고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그들의 의사를 그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은 대제사장과 함께 모여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로마에 저항하기에 너무 무력하고 연약하다. 그러나 활이 당겨졌으므로 우리는 빌라도에게 가서 우리가 들었던 바를 말하고, 그래서 우리 소요를 피하겠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박탈당할 것이고, 우리는 살육당할 것이고 자식들은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말했다.
빌라도는 군인들을 보내어 수많은 군중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를 심문하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선고했다. "그는 은인이다. 그는 범인도 반역자도 아니고 왕권을 추구하는 자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석방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아내가 죽어 갈 때 그녀를 치료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통상적인 장소로 돌아가서 그의 관습적인 일들을 행하였다. 한층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였다. 그는 그의 행위에 의하여 한층 더 영광을 얻었다.
율법 학자들은 시기로 괴로워하였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그를 죽이도록 30달란트를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고 그들에게 그들의 뜻을 관철하도록 자유를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의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을 보아서 비유대교도에게서 나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조상들의 율법'이라는 말은 자신이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기독신자라고 하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방인이었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유대인에 의해서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일인칭 '나는'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실제로 기록자가 예수 시대의 사건들을 본 것 같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듯한 사실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요한과 다른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IV. 랍비 문헌들에서 예수에 대한 기록
랍비문헌들의 발전에 대하여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함과 더불어 제사장 계급의 귀족 정치는 와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산헤드린을 재건하고 율법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고 조직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일을 바리새인 학파들 중의 하나였던 힐렐(Hillel) 학파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하난 벤 차카이의 지도 아래 서부 팔레스타인에 있는 야브네(Yabneh)(얌니아, Jamnia)에 본부를 세웠다. 물론 로마의 허락을 받고 그렇게 했다. 여기서 첫 의장으로 요하난(벤 차카이)이 선출되었고, 산헤드린이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장로회의 전통들이 법제화 되었다. 이것은 판례법 집성체가 되었다. 그리고 랍비 아키바는 이것을 주제에 따라서 첫 번째로 정돈했다. 아키바는 135년에 진압된 유대인 반란 운동을 지원했다가(주도자: Ben-Kosebah를 '야곱에게서 나온 별' 곧 메시야로 인정했다) 반란 진압과 함께 죽었다. 아키바가 죽자 그의 제자 메이어(Meir)가 아키바의 일을 이어 받아서 수정했고 또 계속했다. 이렇게 이어졌던 법전화 작업이 랍비 유다(Judah:170-217년까지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다)에 의해서 주후 200년 경에 완성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종교적 법률 체계 전체를 '미슈나'(Mishnah)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미슈나를 연구하고 주석한 것이 팔레스틴과 바벨론의 랍비 학교들에서 나와서 미슈나를 보충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게마라(Gemara)고 하며, 미슈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탈무드(Talmud)라고 알려져 있다. 그동안 축적된 게마라와 미슈나로 구성된 팔레스틴 탈무드가 완성된 시기가 주후 350 경이다. 바벨론 탈무드는 더욱 커져서 주후 500년 경에 문서화되었다. 이런 전승 자료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기도 했는데, 이 방식을 미드라쉬(Midrashim)라고 한다.
이렇게 발전되는 과정에서 주후 70-200년까지는 탄나임 시대(Tannaitic period)라고 한다. 탄나임(Tanna'im)이라는 말은 "암송자들"이라는 뜻으로 전승들을 암송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시기의 랍비들이 주로 전승들을 암송하여 전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바라이토트(baraithoth, baraitha의 복수형)라고 불리는 전승들이 출현한다. 미슈나에 대한 "외적인 자료' 즉 참고 자료쯤으로 여겨지는 자료 같다.
이 시기의 랍비 문헌에서 예수에 관한 전승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신뢰할 만한 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하여 무조건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편에서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무드의 소책자 Sanhedrin(43a)에 들어 있는 바라이타(baraitha)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예수는 유월절 전야에 매달렸다. 40일 전에 고지자가 이렇게 외쳤다: '그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행했고,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였고, 그들을 배교로 꾀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할 말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와서 그것을 천명하게 하라.'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므로 그는 유월절 전야에 매달렸다."
이 바라이타에 3세기 말경의 랍비 울라(Ulla)는 약간의 언급을 추가한다: "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즉, '너는 그를 위하여 아주 열심히 어떤 변호가 추구되었으리라고 믿으려 하는가? 그는 사기꾼이었다. 가장 자비하신 자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의 목숨을 살려 주지도 말고, 그를 숨겨주지도 말라,' 예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왕의 신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바라이타는 예수가 유월절 전날 밤에 매달렸다고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기사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요한복음은 유월절 예비일(전날) 제 6시에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넘겨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요19:14).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음과, 그가 마술을 행하며 백성을 미혹하여 배교로 이끌었으며, 사기꾼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을 성경도 말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의 종교법을 어긴 죄인이었다. 그래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바라이타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 곧 주후 7,80년 경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과 랍비들 간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랍비 울라가 예수가 왕의 신분에 가까웠다고 하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이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예수를 의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랍비 문헌에서 때때로 예수는 벤 판테라(Ben Pantera) 혹은 벤 판디라(Ben Pandira)라고 불린다. 이것은 희랍어 처녀를 가르키는 parthenos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처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조롱거리로 변형되어 사용되었을 것이다.
또 랍비 문헌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처형을 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랍비들을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는 다섯 제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마타이(Mathai), 나카이(Naqai), 니제르(Nizer), 부니(Buni), 토다(Todah).
마타이가 법정 앞에 불려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 마타이가 하나님 앞에 와서 나타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마타이가 사형에 처해져야 합니까? 그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렇다. 마타이는 죽을 것이고, 그의 이름은 망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마타이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묻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다섯 명을 다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랍비들을 대답한다. 유대교를 배반하고 예수를 따라서 백성을 미혹한 제자들도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마타이'는 마태를, 니카이는 니고데모를, 부니는 '보아너게'(요한의 형제들에게 주신 별명)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토다는 다대오와 같은 이름이며, 니제르는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제자를 이렇게 불렀을지도 모른다. 12명이 아니라 5명을 말한 것은 랍비들에게 주로 알려진 사람들이 활동적인 다섯 명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5명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베드로,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 무명의 제자 요한).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몇이든지, 제자들은 다 사형감이라는 것을 랍비들이 가르쳤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사형감이었다.
V. 쿰란문서에서의 메시야 기대
쿰란 문서란 사해 북서쪽 해안의 쿰란 지역에서 열 한 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대량의 두루마리들을 가리킨다. 1947에 한 목동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동굴로 던진 돌에 항아리 깨어지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서 보고 발견한 것이다. 그 이후로 사해문서는 계속해서 연구되어서 지금은 거의 다 그 내용이 밝혀진 상태가 된 줄 안다. 그 두루마리들은 구약의 거의 모든 성경을 부분적으로 포함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사야서 두루마리는 거의 전체가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은 지금 교회가 가진 히브리어 구약성경 내용과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이사야 6장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쿰란의 두루마리에서는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되어 있는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이미 자기들 나름의 독자적인 구약 성경 사본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쿰란 공동체는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를 탄식하면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공동체였다. 그들은 거기서 경건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했었다. 자신들을 메시야를 맞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면서 정결한 생활을 굉장히 힘쓰면서(의식적이었지만) 살았었다. 그 구성원은 심지어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후 66년에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하면서 로마 군에 의해서 이곳도 파괴되었는데, 이 때에 그들이 보관을 위해서 두루마리들을 동굴로 옮겼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이 사건이 쿰란 공동체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종말을 맞기까지 약 2 세기동안 그곳에서 그 공동체는 유지되었었다. 이들은 사독제사장 계열이 주전 168년경에 폐지되고, 대신 하스몬 가문이 제사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에 하스몬 가문의 제사장 승계를 거부하였던 것 같다. 그들은 하스몬가가 제사장직을 탈취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쿰란 지역으로 들어가서 은거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가 가까웠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이 선생으로 따르던 '의의 교사'가 죽자 그들은 다시 아론 가문의 제사장이 일어나고 다윗가문의 메시야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오 주님,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일으키소서/ 오 하나님, 당신이 아시는 시간에/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불의한 지배자들을 분쇄할 수 있는 힘으로 에워싸 주소서.../ 그는 그의 멍에 아래서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민족들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땅의 찬미로써 주를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낡았으므로 그것을 거룩 속에서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들이 땅 끝으로부터 와서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고/ 약해졌던 그녀의 아들들을 선물로서 가져가게 하고/ 하나님이 그녀(예루살렘)를 그것으로 영화롭게 하였던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은 한 의로운 왕이 그들의 통치자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그의 모든 날에 불의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거룩해질 것은, 그들의 왕이 기름 부음 받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선지자들의 예언과 천사의 고지와 마리아의 찬양과 스가랴의 노래와 연결되고 있다(눅1:32,3546-55,68).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대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조용하게 은거하였던 사람들에게서 예기되었다. 이 기대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예수의 흔적은 외경들과 코란과 회교 전통에도 있고, 고고학적 발견물에서도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코란과 회교 전통에서는 예수의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예수의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경 안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 밖에도 많은 증거들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들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역사적인 증거도 신약 성경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신약성경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더욱 확증해 준다. 따라서 이것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변증하는데 기여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은 부경성경연구원(http://www.bkbs.org/index.php?mid=olddata&document_srl=6151)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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