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해석학에 대한 세 가지 관점(2) 본문

疎通 2 (with YHWH)/Grasping His Story

해석학에 대한 세 가지 관점(2)

에제르 2012. 3. 6. 13:48


2. 본문 중심의 해석학

저자 중심의 해석학은 1930년대에 이르러 도전에 직면한다. 저자의 통제에서 벗어나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의미를 확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W. K. 윔사트(Wimsatt)와 몬로 비어스리(Monroe C. Beardsley)는 저자의 의도를 좇아가려는 잘못된 추구를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라고 지적하며 텍스트의 자율을 강조한다. 그들은 저자의 의도란 알 수도 없으며 이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해석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문학계에서는 T. S. 엘리옷(Eliot)와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를 중심으로 본문중심의 해석학 운동이 일어나고 이러한 움직임을 “신비평”(New Criticism)이라 부른다. 독자가 지닌 것은 텍스트 밖에 없기 때문에 텍스트만을 가지고 해석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한결 같이 저자에게 통제 받는 해석을 거부하고 텍스트가 의미형성의 최종단계로 보면서 본문의 자율성을 부르짖는다.

신학계에서도 마찬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같은 실존주의 철학은 저자에게서 본문을 해방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 불트만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니다. 성경의 의미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새롭게 드러나기 때문에 늘 열어 두어야 한다.”  폴 리쾨르(Paul Ricoeur) 역시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의 이유로 본문의 자율을 강조한다. 첫째, 그는 “성경언어의 은유적인 속성” (metaphorical nature of biblical language)을 강조한다. 은유적인 언어는 저자의 하나의 의도에 제한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둘째, 본문과 저자를 분리하는 근거로 구두적 전달과 문어적 전달의 차이를 든다. 그는 “글에서 본문의 언어적 의미는 본문의 정신적 의미나 본문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독자는 저자의 정신적 세계를 온전히 알 수도 없으며 정신적 세계에서 추구하는 의미가 문자적 의미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오직 본문만을 가지고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성경 해석에서의 문학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중시하지 않고 성경의 문학성에 집중하여 본문만의 의미를 강조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본문 중심의 해석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저자 중심 해석학의 부당성을 몇 가지로 지적한다. 필자는 네 가지로 그 주장을 나누어 설명한 후 각각 주장이 지니는 함정을 제시한 후 저자 중심의 해석학을 변증하고자 한다. 첫째, 저자는 죽었으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가진 것은 본문밖에 없기 때문에 본문만을 가지고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물론 본문을 기록한 많은 저자는 이미 죽었고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를 알기 위해 저자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독자가 저자의 머리로 들어갈 수 없다면 그의 의도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거듭나기 위해 여인의 배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듯이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저자의 머리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저자는 이미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본문에 기록해 놓았다. 해석자의 사명은 본문을 통하여 저자가 의도하는 목소리를 진실하게 듣는 일이다.

둘째,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석자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해석자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본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완전히”(perfect)라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충분히”(adequate) 알 수는 있다. 저자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저자의 머리 속에 들어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찾는 노력을 포기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성경 해석자가 모든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심각한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계시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사실을 믿는다. 허쉬는 저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 수 없기에 저자 중심의 해석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의 부당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해석에서 확실히 알 수는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혼동하는 것은 논리적인 실수다.… 중요한 것은 해석자가 확실하게 아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하는 의미를 알 수 있느냐의 문제다.”

셋째, 본문의 의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본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의 결정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동일하다. 르네 월렉(Rene Wellek)과 어스틴 워런(Austin Warren)은 문학계에서 이러한 주장을 널리 펼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문은 자신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고 주장한다. 허쉬는 시대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의미를 중요성이란 말로 설명한다. 의미란 본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며, 중요성은 상황과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란 본문에 나타난 것이며 저자가 특정한 지시부호를 연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의도하는 것이다. 의미란 그 부호들이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중요성이란 사람, 관념, 상황, 혹은 상상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간에 의미와의 관계이다.”  저자의 의도는 공적이며 객관적이며 언제라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불변의 것이다. 한편 의미에서 파생되는 중요성이란 그 의미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넷째, 저자도 때로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기록할 수 있다. 소위 “저자의 무지”(authorial ignorance)라는 말은 저자 자신도 자신의 주제에 관한 완전한 인식이 결핍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후대의 사람이 저자보다 더 잘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칸트(Kant)는 자신의 프라톤(Plato)에 대한 인식이 플라톤이 스스로 이해한 것보다 더 잘 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저자가 일상의 대화나 글에서 자신이 말하는 주제에 관하여 표현하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저자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말에 나타난 칸트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한다. 칸트는 저자가 의도하는
것 자체를 저자보다 더 명확하게 안다는 말보다 저자가 말하는 그 주제에 관하여 저자보다 오히려 더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칸트가 플라톤보다 더 잘 이해한다는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중심 주제인 ‘이데아’(The Idea)에 관하여 더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후대의 독자가 원 저자가 의도한 것보다 더 잘 알 수 있는가의 문제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성경저자가 기록한 의도보다 후대 독자들이 더 잘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저자의 의도에 해석학의 축을 두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주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성경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모르고 기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저자와 성경의 저자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인간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후대에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저자의 의도를 약화시킨다.

성경에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가 후대에 발견되는 구절이 많다. 이 문제를 두 가지 질문으로 살펴보자. 첫째, 성경저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다 알고 기록했는가? 둘째, 성경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말씀을 후대에 하나님이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가?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우리는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다. 성경저자는 하나님이 의도하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저자에게 의도하신 말씀은 충실하게 기록했다고 볼 수는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저자에게 영감으로 주셔서 본문에 기록한 말씀과 같지 않는 다른 의미를 본문이 의도할 수는 없다.

저자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다 알고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말과 자신도 모르는 것을 기록했다는 말은 다른 의미다. 저자가 기록할 당시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즉 계시가 발전됨에 따라 후대에 와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많다. 예를들어“, 내가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창세기3:15절 말씀을 기록할 때 모세의 인식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모세와 오늘날 독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모세도 우리처럼 이 말씀은 언젠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임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과 처녀
에게서 탄생될 것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날 것은 알지 못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본문만을 의미 해석의 결정인자로 보는 주장을 논하고 저자 중심의 해석학적 입장에서 평가했다. 본문만을 다루는 신비평은 몇 가지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첫째, 저자의 배경이나 정신적 의도를 살피는 것보다 본문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움직임은 본문에 대한 중요성을 높여준다. 본문의 문자적 연구를 위한 관심을 집중시켜 준 것은 해석학의 큰 발전이다. 주해자가 저자의 의도를 살펴야 할 일차적 대상은 본문자체이기 때문이다. 둘째, 본문자체에 대한 집중된 관심은 본문이 계시의 최종형태라는 점을 강조하여 본문이 기록된 형태를 강조한다. 본문의 문예적 형식은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라는 보수주의 해석학에서 오랫동안 파
묻혀온 부분이다. 계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 자체이지만 이 말씀이 기록된 형식을 면밀히 살피면 내용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본문의 자율성을 강조하면 결국 독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결국 본문의 객관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주장은 본문을 읽어내는 독자가 의미가 결정되는 독자비평의 문을 열어 놓는다. 저자가 없는 본문은 중립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문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그 의미 결정을 내어 줄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류응렬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설교학)의 논문 『성경적 설교를 위한 저자 중심의 해석학』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