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삶
예수님과 율법(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본문
율법서들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서너 가지로 지적한다.
1. 율법서들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한 그 다음에 그 죄가 퍼지고 발전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창3-6장), 구속주를 외쳐 구한다. 구세주에 대한 최초의 약속은 창세기 3:15에 벌써 나온다. 이처럼 처음부터 구약 독자는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만든 존재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분이 오시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창세기의 어떤 족장도, 이스라엘의 어떤 초기 지도자도 그 구세주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죄를 짓고 죽었으며, 그들 자신이 구속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2. 많은 사람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에 대해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사람일 뿐이야.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하셔. 모든 사람이 낙제를 한다면 좋은 선생님은 학점을 조금 올려주고 기준을 조금 낮출 거야. 하나님도 분명 그러실거야. 그분은 용서하실거야. 그게 그분의 일이거든!" 하고 추론한다. 율법은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정의와 거룩함의 기준을 표현한다. 그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다. 그분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그분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의 훌륭한 구조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죄는 보편적 죄책을 낳으며 보편적 벌을 받아야 한다. 율법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 제도를 제정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날마다, 해마다, 제사장들은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렸다. 의식들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은 그 제사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인간의 죄책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구속항 수는 없다(히 10:2-4,11).
3.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에 대해 두 번째 해결책을 제안한다. 그들은 이렇게 상상한다. "아마 우리는 과거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바로잡고 더 잘 살 수 있어. 우리의 우리의 선행과 우리의 선한 의도들이 우리의 오류를 상쇄하고도 남을거야." 다시 한번 율법은 이러한 상상에 동의하지 않고, 우리가 죄에 속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죄의 결과를 안 후에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약하거나 변화될 수 없거나, 반역적이거나, 변화를 거부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에게 잘못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우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사실상, 율법은 죄를 억제하시는커녕, 때로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율법이 간음을 금한다면, 어떤 사람은 왜 그런지 물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롬7:1-12). 그래서 모든 율법 연구는 논리상 예수님에 대한 논의로 이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죄에 대한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약점, 죄책, 해방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죄를 속하는 제사에 대해 읽을 때마다, 그것은 최종적이고 완전한 제사이신 예수님께 주의를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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